빈소 찾은 70세 원모 씨
조문 발길 이어져… 이틀간 400명 24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김군자 할머니의 빈소가 마련된 경기 성남시 분당차병원 장례식장에서 시민들이 조문하고 있다. 이날 빈소에는 이낙연 국무총리 등 각계 인사들의 발길이 이틀째 이어졌다. 성남=전영한 기자 scoopjyh@donga.com
1992년 어느 날 초라한 행색의 한 할머니가 지팡이를 짚으며 군청에 들어왔다. 할머니는 “건강보험 한도가 초과됐다. 돈이 부족해서 병원 진료를 받을 수 없다”며 원 씨에게 하소연했다. 원 씨는 ‘김군자’라는 이름의 할머니를 보며 비슷한 나이의 어머니가 생각났다. 그래서 구체적인 상황을 알려 달라고 했다. 그러나 김 할머니는 “산속에서 자식도 없이 혼자 산다”고 말한 뒤 더 이상 언급을 꺼렸다.
원 씨는 무작정 김 할머니를 따라갔다. 계곡 깊숙한 곳에 이르자 작고 낡은 초가집이 보였다. 방에는 이불, 탁자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하지만 김 할머니는 “세상 창피해 얘기 못 한다. 말 못 할 사연이 있다”며 입을 굳게 닫았다. 원 씨는 계속 김 할머니를 찾았다. 만남이 계속되자 김 할머니는 경계심을 늦추고 마음을 열기 시작했다.
원 씨는 할머니에게 위안부 피해자로 정부의 공식 인정을 받자고 제안했다. 김 할머니는 “세상 사람들이 나에게 손가락질을 하지 않겠느냐”며 단칼에 거절했다. 원 씨는 “절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라며 끈질기게 설득했다. 결국 김 할머니는 원 씨의 도움을 받아 정부의 위안부 피해자로 인정받았다.
그런데 얼마 뒤 김 할머니는 갑자기 “제주도에 가야 한다”며 짐을 쌌다. 이전부터 김 할머니와 연락을 주고받던 한 종교단체가 제주도로 가라고 했다는 것. 당시 김 할머니는 몸이 불편해 병원 치료를 받아야 했다. 제주도로 가기 전날 원 씨는 억수같이 비가 내리는 가운데 김 할머니를 찾아가 간곡히 설득했다. 진심을 담은 원 씨의 말에 할머니는 결국 정선에 남기로 했다.
원 씨는 지인들의 도움을 받아 읍내에 거처를 마련하고 김 할머니를 모셔 왔다. 김 할머니가 사용할 TV, 세탁기 등 가전제품도 구했다. 김 할머니는 원 씨의 조언으로 천주교 신자가 돼 ‘요안나’라는 세례명을 얻었다. 원 씨는 종교적 후견인인 대모(代母)가 됐다. 원 씨는 김 할머니가 1998년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를 위한 복지시설인 경기 광주시 ‘나눔의 집’으로 거처를 옮긴 뒤에도 살뜰히 챙겼다.
지난밤 원 씨는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할머니의 임종을 지키지 못했다는 자책 탓이다. 그는 “위안부 피해자 인정을 받은 뒤 주변에 자랑할 정도로 할머니도 좋아하셨다”며 “최근 몇 년 동안 건강 때문에 연락을 못 드리다 이제 좋아져서 다음 주에 아들과 함께 찾아뵈려 했는데…”라며 눈시울을 붉혔다.
성남=권기범 기자 kaki@donga.com / 오승은 인턴기자 인제대 신문방송학과 4학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