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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규선의 연극인 열전]무대영상 윤형철 “이제 겨우 시작했을 뿐이다”

입력 | 2017-07-26 22:40:00


무대영상 디자이너 윤형철. 그는 영화판에서 몸을 담고 있다가 연극으로 왔다. 영화판에서의 실패도 숨기지 않는다. 지금은 연극 작업이 좋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의 앞에는 적어도 두 가지 큰 허들이 놓여 있다. 우선은 더 많은, 더 다양한 연극인들과 작업을 해봐야 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영상을 어떤 방식으로 만들어 얼마만큼 관여시키는 것이 ‘연극적으로 훌륭한 것인지’에 대한 예술적 감각을 키우는 일이다. 그에게 시간이 필요한 이유다. 김경제 기자 kjk5873@donga.com

나이에 비해 세상을 빨리 관조하게 된 것 같다. 영화 ‘시네마천국’에 나오는 어린 영사기사 ‘토토’만큼 영화를 좋아했지만 현실은 그리 녹록치 않았던 듯하다.

“영화판에서는 잘 안 풀렸다. 큰 영화사를 갔는데도 안 되고…. 세 번 모두 준비만 하다 끝났다. 도중에 한예종 영상원과 영화아카데미에도 지원했지만 둘 다 떨어졌다. 한번 떨어지니 더 도전 하고 싶은 생각이 안 들었다. 경제적으로 어려워져 홍보프로덕션에 들어가 관공서 홍보물을 만들기도 했다.”

지금도 영화에 미련이 있나.

“영화라는 포맷은 여전히 좋아한다. 그러나 상업영화에 대한 미련은 없다. 내가 영화판에 몸담고 있을 때 절실하지 못했던 것 같다. ‘돈 머리’가 굴러가야 하는데, 안 돌아갔다. 성격 탓이다. 잘못하다가는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피해를 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결국 그는 영화에서 연극으로 건너온다. 그리고 영화에서 일하던 경험을 살려 지금은 무대영상 디자이너의 길을 걷고 있다. ‘그’는 윤형철(44)이다. 무대영상 디자이너를 외국에서는 ‘프로젝션 디자이너’로 부르기도 한다.

1. 영화에 빠지다


그는 서울에서 태어나 초중고는 물론이고 대학까지 서울에서 나왔다. 고려대 기계공학과(92학번)를 졸업했다.

“중학생 때부터 영화 보는 것을 좋아했다. 대학 2학년 때 본격적으로 영화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영화평론가 정성일이 진행하는 라디오도 듣고, ‘키노’라는 잡지도 읽으면서. 영화동아리활동은 하지 않았지만 도서관의 영화서적은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몽땅 읽었다.”

아직도 그의 뇌리에 각인된 영화가 있다.

“장정일의 소설을 장선우 감독이 영화로 만든 ‘너에게로 나를 보낸다’이다. 대학 3학년 때인 94년에 본 것으로 기억하는데, 우리나라 영화도 예술성 면에서 선진국에 뒤지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리고 막연하나마 영화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취직을 해야 할 때 IMF를 만난 것은 악연인지, 운명인지.

“고대 기계공학과는 졸업만 하면 시험도 안보고 데려갔다고 하는데, IMF가 오면서 취직이 안됐다. 공부를 더 해야 하나, 고민을 하다가 변리사시험도 기웃거려 봤다. 그래도 취직이 안됐다. 그래, 그렇다면 영상관련 직업을 해보자고 결심했다. 조그만 영상프로덕션에 취직했다. (집에서 반대는 안 했는지?) IMF로 취직이 어려우니 먼저 경험을 쌓아야 한다고 했다. 그러자 ‘열심히 해라, 노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느냐’고 하셨다.”

그는 2001년부터 2012년까지 5편의 단편극영화를 만든다. 세 편은 본인이 연출·시나리오·편집을 했고(‘소풍가는 날’ ‘별에게 가는 길은 태양과는 반대의 길일까?’ ‘너무 이른 오후 3시’), 한 편은 연출·시나리오·촬영·편집을 했고(‘누가 연출을 두려워하랴’), 한 편은 총연출·편집을 맡았다(‘작은 이야기’). 한마디로 혼자서 북 치고 장구쳤다는 얘기인데, 2003년의 ‘작은 이야기’가 제1회 민들레영토 영화제에서 남녀연기상을 받는 것 외에는 뚜렷한 실적을 남기지 못했다. 본인이 “영화판에서 안 풀렸다”고 말했듯.

단편극영화만 만들어서는 먹고 살 수도 없었을 것 같다(그는 2007년 결혼했다). 국립전주박물관 민속관의 전시영상도 만들고 모토로라의 UCC 공모전에도 입선했지만, 그게 본업이 될 수는 없었다.

2. 연극에서 길을 찾다

영화에서 탈출구가 보이지 않을 때 연극에서 손을 내밀었다. 윤형철이 연극판에서 처음 무대영상을 맡은 것은 2012년 극단 백수광부의 ‘숲속의 잠자는 옥희’다. 그는 같은 해에 마지막 단편극영화 ‘누가 연출을 두려워하랴’를 만들었으니 2012년은 윤형철의 인생에서 영화에서 연극으로 건너가는 ‘변곡점의 해’였다고나 할까.

2012년 극단 백수광부의 ‘숲속의 잠자는 옥희’의 한 장면. 극 중에서 소설을 쓰는 주인공 옥희의 내면을 보여주기 위해 무대 오른쪽에다 잠자는 숲 속의 공주 이야기를 애니메이션 형식으로 보여줬다. 윤형철은 우소영 작가가 그린 일러스트레이션을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 투사했다. 연극계로 와서 처음 맡은 작품이라 기억에 남는다고 한다. 극단 백수광부 제공

‘숲속의 잠자는 옥희’는 최치언 작가가 쓴 것인데, 윤형철은 2000년 초반부터 그를 형님이라고 부르며 알고 지내는 사이였다. 최 작가는 영상 애니메이션이 들어가는 것을 전제로 이 작품을 집필했다. 윤형철은 전문가가 그려온 일러스트레이션에 배경을 입히고 효과음을 넣어 영상을 만들었다.

사실 ‘숲속의 잠자는 옥희’를 맡기 전에 무대영상의 맛을 살짝 본 적은 있다. 2008년 씨네뮤지컬이 만든 ‘미스터 조’에서였다.

그는 “영화를 했으니 당연히 영상에 대한 애정이 있는데, 무대영상을 접해보니 ‘이건 아니다’ 싶을 정도로 상황이 열악했다”고 회고했다.

“연극판에 들어와 보니 영화나 방송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전문기기가 아닌 곰플레이어로 영상을 작동시키질 않나, 한 사람이 이곳저곳을 왔다 갔다 하면서 일을 하지 않나. 불안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을 정도였다. 그런 상황을 보면서 ‘언제까지 이 일을 할 수 있을까’ 걱정했다.”

그러나 간사한 것이 인간이라지 않는가.

“2013년에 세 작품을 잇달아 하다보니 생각이 바뀌었다. 처음에는 본공연 직전에 무대설치(셋업)를 하는데 사흘을 준다고 하면 그것 갖고 뭘 하느냐고 했는데, 지금은 나흘을 준다고 하면 ‘어, 많이 주네’하고 생각한다.”

영상 일은 연출이 직접 요청하거나 알음알음으로 얻게 된다. 그는 “영화를 해봐서 아는데, 연극도 새로운 스태프와 일하는 것을 두려워한다. 그래도 나는 새로운 분들과 작업하고 싶은 마음이 많다”고 말한다.

사실 연극으로 건너왔다고는 해도 그가 연극 영상을 한 지는 5년밖에 되지 않는다. 그것도 대부분 극단 백수광부(대표 이성열)와 극단 고래(대표 이해성)의 작품들이다. 그의 말대로 저변과 외연을 확대할 필요가 있다.

영상 작업의 프로세스가 궁금했다.

“일을 맡기로 하면 우선 대본을 보내달라고 한다. 그리고 사전에 알아둬야 할 것이 없는지 묻는다. 일종의 가이드라인이라고나 할까. 예를 들어 ‘벚꽃동산’을 연출한 이성열 연출가는 ‘꿈’이라는 키워드로 이 작품을 풀어가겠다고 했다. 다음에는 대본 분석을 한다. 고전이라면 자료를 찾고, 창작극이라면 관련된 문학작품이나 그림, 음악 등을 조사해서 아이디어를 얻는다.”

이 일도 본인만 좋다고 해서 끝낼 일이 아니다.

“전체 스태프 회의에서 대략 준비한 자료 등을 보여주고, 스태프 회의를 몇 번 더 해가면서 다듬는다. 스태프 회의에서 가장 중요한 관심은 무대디자인이다. 무대디자인이 바뀌면 체크해 가면서 영상을 어떻게 뿌릴지를 고민한다. 먼저 고려해야 할 순서를 따지자면 무대, 조명, 영상의 순이라고나 할까. 어느 정도 작업이 이뤄지면 연출가에게 영상샘플을 보낸다. 어느 부분에 어떤 영상을 쓰는지를 알려주는 것이다. 지적을 하면 고쳐서 다시 보내 주고. 최대한 실제처럼 보여주려고 하지만 셋업 때 많이 바뀐다. 공연 도중에 바뀌기도 한다. 연출이 바꾸라고 하기도 하고, 잘못 계산한 부분이나 미진한 부분은 내가 바꾸기도 한다. 어떻게 보면 마지막 공연이 ‘완전체’라고나 할까(웃음).”

사전 준비는 어떻게 하나.

“기술적인 준비는 먼저 해둔다. 문제는 영감이다. 하루 종일 그 생각만 한다. 밭에서 풀을 뽑을 때도, 밥을 먹을 때도…. 그러면 경우의 수가 나온다. 정 안 떠오르면 도서관에 가서 하루 종일 자료만 찾으면서 그 생각을 한다. 그렇게 해서 만든 것이라도 연출이 아니라고 하면 버리는 것이고….”

요즘은 어느 때 영상을 사용하는지.

“‘벚꽃동산’은 아까 ‘꿈’으로 해석했다고 했는데, 그래서 영상이 많이 들어갔다. 영상자체가 일루전(illusion)이니 영상을 투사하는 것만으로도 환상이나 꿈같은 분위기를 나타낸다. ‘불량청년’에서는 관객에게 마음의 준비를 시키는 역할을 한다. 배우들이 등장하기 전에 영상으로 만화 같은 광화문을 보여줬다. 이는 이 연극이 만화처럼, 비사실적인 연극이라는 것을 암시하면서 분위기를 잡아주는 것이다. 물론 사실적으로 촬영한 영상이나 연극 내용과 관련된 영상을 보여주는 경우도 있다.” 그는 2015년 ‘불량청년’으로 서울연극제 무대예술상을 수상했다.

무대 영상이 점점 늘어나는 이유는 기술의 진보와도 관련이 있다.

“요즘은 여건도, 프로그램도 좋아졌다. 예전 방송국에서 쓰는 콘솔이 지금은 노트북 안으로 들어왔다. 수 천 만 원짜리 기계가 하던 일을 노트북이 한다는 뜻이다. 5000~6000 ANSI lumens(프로젝터의 밝기 단위) 정도의 제품은 낮에 회의실에서 켜 놓아도 보일 정도인데, 지금은 200만~300만원이면 살 수 있다. 5년 후에는 더 싸질 것이다. 스마트폰이 널리 보급되면서 영상은 이제 생활 속으로 들어왔다. 가면 갈수록 영상 활용은 더 많아질 것이다.”

그는 “예전에 시도를 해봤지만, 돈이 너무 들어가고 기술적으로도 어려워 녹이 슬었던 아이디어들이 지금은 노트북과 간단한 장비만으로도 구현해 볼 수 있는 환경이 갖춰지고 있다”고 했다.

그러나 영상의 길은 외롭다.

“나보다 몇 살 더 먹은 70년생쯤이 영상 1세대일 것이다. 개인PC로 작업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하니까. 그렇지만 영상하는 ‘동업자’를 현장에서 만나본 적은 없다. 만나고 싶다. 뮤지컬 쪽에는 강의를 나가는 사람이 있을 정도로 꽤 되는 것 같다. 연극 쪽에서는 윤민철 씨라고 계신데, 전화만 하고 만난 적은 없다. 이름도 나와 꽤 비슷한데….”

3. 영상 vs 연기

그에게 영상이 잘 됐는지, 못 됐는지는 어떻게 평가를 하느냐고 물었다.

“조명과 영상에 대해 ‘뭐로 만든 거지’라고 할 정도가 되면 제일 성공한 것이다. ‘저 영상은 잘 됐네’ 하면 절반의 성공이다. 기술적인 부분은 극에 잘 녹아들어가서 튀지 않고, 잘 보이지 않는 게 성공한 것이다. ‘배우가 연기를 참 잘 하더라’는 말을 들어야 궁극적으로 영상도 성공한 것이다. 영상만 성공하는 일이란 있을 수 없다.”

영상이 그의 밥줄이지만 윤형철은 영상에 대해 조금 독특한 시각을 갖고 있다.

“나는 연극이 영상을 많이 쓰는 것에는 조심스러운 편이다. 영화적 기법을 활용해 스크린에 직접적으로 영상을 내보내는 것에 대해 아직은 꺼린다. TV 보듯, 영화 보듯, 갑자기 영상이 들어오는 것은 관객에 대한 강요다. 그런 것은 안 하려고 한다.”

2017년 극단 고래의 ‘불량청년’에는 극의 끝과 처음에 광화문 광장이 나온다. 2015년 초연 때의 광화문 광장과는 많이 달라졌지만, 초연 때의 분위기를 살려가면서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한다. 그래서 첫 장면에는 천막과 블랙텐트를 영상으로 추가했다. 그러나 마지막 장면에서는 블랙텐트는 사라지고 최은진 씨의 만요(漫謠)에 맞춰 전 출연진이 나와 한바탕 신나게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춘다. 사진은 그 장면이다. 극단 고래 제공



나름의 논리가 있다.

“영상이 너무 설명하려고 들면 연극은 망해버린다. 연극은 배우의 예술이다. 관객은 배우를 보러 온다. 영상이 잘난 척하는 순간 밸런스가 깨진다. 예전에는 영상이 연기에 걸림돌이 되기도 했다. 영상을 먼저 틀어놓고 배우가 거기에 맞추도록 하면 배우도 힘이 빠진다. 그런데 요즘은 그런 게 사라졌다. 기술적 진보에 따라 컨트롤이 가능해져 영상은 배우에게 잘 맞춰 준다. 그래서 같은 이름의 연극을 공연한다 해도 엄격히 말하면 매일 매일의 연극이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사실 연극과 영상의 만남은 최근에 시작됐다고 짐작하기 쉽지만 이미 100년 전에도 다양한 실험과 시도가 있었다고 한다. 한때 ‘키노드라마’라고 해서 영화와 드라마를 결합한 형태가 등장했고, 독일의 연출가 어윈 피스카토르(Erwin Piscator)는 필름, 사진, 몽타주, 플래카드, 깃발 등 당시로서는 최첨단 테크놀로지를 연극과 결합한 그 방면의 선구자였다.

영화에서 컴퓨터그래픽을 쓰지 않는 감독이 있듯, 연극에서도 영상 사용을 꺼리는 연출가가 있다. 대체로 영상 사용이 늘어날 것이라는 전망이 많지만 무조건 영상 사용을 늘려서는 안 된다는 반론도 적지 않다.

윤형철 씨가 소개한 글에는 이런 대목들이 나온다.

“앞으로 영상 사용은 점점 늘어날 것이다. 그것은 시대적 흐름이다. 그러나 영상만이 모든 해답은 아니다. 원작 애니메이션의 효과를 인형과 연극적 상상력으로 넘어선 ‘라이온 킹’의 무대 메커니즘은 어떤 영상이 주는 감동보다도 크다.

아날로그적인 정서가 강한 공연에서 디지털적인 정서의 영상 사용은 반드시 득이 되는 것도 아니다. 영상은 작품의 형식과 내용, 그리고 작품의 정서를 충분히 고려해 사용해야 할 것이다”(박병성, 공연과 영상이 만날 때, 더 뮤지컬, 2013년 11월호).

“최근과 같이 볼거리가 많은 최첨단 멀티미디어 시대에 배우들의 대사만을 듣기 위해 극장을 찾는 관객들이 몇 명이나 될까. 진지한 연극이 외면당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하지만 무대 위에 현란한 이미지가 난무하고 언어의 미적인 요소가 파괴된 채 전위적인 움직임만이 남아 있는 공연장에서 오히려 허탈감을 느끼며 빈 무대에서 차분하게 대사를 읊는 배우들을 그리워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연극의 다양성 측면에서 전통 리얼리즘 연극은 중심에 서 있어야 되지만 시대의 흐름과 관객들의 요구를 받아들이는 다양한 연극양식들도 개발되어야 할 시점에 이르렀다. 연극이 미디어아트의 최첨단 테크놀로지와 융합되고 있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다”(윤우영 극단 청맥 대표, 연극과 영상이 하나가 되는 판타지의 세계로, 사이언스 타임스, 2014).

두 전문가의 견해를 읽어보면 연극과 영상의 결합이 득이 될지, 독이 될지 아직은 판단을 유보하고 있는 듯하다. 하나마나한 소리가 될지 모르지만 ‘연극과 영상은 결합은 하되, 잘 해야 의미가 있다’는 뜻 같다. 이는 윤형철의 고민이기도 하다.

4. 영상의 길과 강화도

그는 영상을 과다하게 사용하는 것에 대해서도 경계를 하지만 “영상을 쓰는 것은 연극적이지 않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다른 생각을 갖고 있다.

“연극적이고 아니고는 미리 결정돼 있는 것이 아니다. 똑같은 영상이라도 경우에 따라 연극적일 수도 있고, 연극적이지 않을 수도 있다. 연극에서 영상을 어떻게 사용해야 가장 연극적일 것인가. 지금 내가 고민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이런 고민은 앞으로도 계속 될 것이다. 그리고 고민의 와중에도 끊임없이 새로운 시도가 이뤄질 것이다.”

2017년 극단 백수광부의 ‘벚꽃동산’ 중 3막에서 예삐호도프와 듀냐사가 대화하는 장면. 샹들리에 영상 위로 실시간 무대 영상을 겹쳐서 투사했다. 이성열 연출은 ‘꿈’이라는 개념으로 이 작품을 해석했다. 그래서 윤형철도 지금 하고 있는 행위조차 꿈결 같다는 인식을 주기 위해 이중투사라는 방법을 생각해냈다. 윤형철은 기술적으로는 아쉬움이 많이 남았지만, 가능성을 확인하는 기회이기도 했다고 말했다. 극단 백수광부 제공



그는 자신이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지금은 투자단계라고 생각한다. 연극을 한 지가 얼마 되지 않으니, 시간과 품으로 때우고 있다. 혼자서 배운 기술이라서 논리가 정연하지도 않다. 그렇다고 내가 구사할 수 있는 기술을 다 쓴 것도 아니다. 극단에 매년 신입단원이 들어온다는 게 신기하고 고맙다. 그 친구들이 영상을 잘 쓸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다. 지금 20대인 그들이 내 나이 쯤 되면 영상과 접할 기회가 더 많아질 테니.”

그는 프로젝터나 카메라 등 충분한 장비를 갖추고 있지 않다. 대부분 렌트해서 쓴다. 경제적인 여유가 없어서이기도 하지만, 장비로 불려가지 않고 실력으로 불려가겠다는 오기도 없지 않다.

그는 불쑥 “요즘 말하는 능력이 퇴화하는 것 같다”고 했다.

우선은 혼자서 작업하는 시간이 길기 때문이다.

“나는 스스로를 ‘가내영상수공업자’라고 부른다. 팀으로 일하면 좋겠지만 그만한 일거리가 없다.”

다른 이유는 자신의 작업을 이해해주는 사람이 적기 때문이다.

“요즘 일년에 3편 정도의 작품을 맡는다. 작품을 올리기 전의 시(始)파티와 끝나고 나서의 쫑파티에서 그동안 못 다한 말을 다 털어놓는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관심도 없고 잘 알지도 못한다. 그래서 말을 자제하려고 한다. 그러다 보니 말수가 급격히 줄어들었다.”

그는 경기도 남양주시 도심역 근처의 전세 아파트에서 살다가 2014년 인천광역시의 강화도 전등사 부근으로 이사를 했다. 당시 강남 신사역 부근에 사무실을 열고 연극과 홍보프로덕션을 함께 하려고 했는데, 수주를 기대했던 꽤 큰 프로젝트를 낙하산을 타고 내려온 경쟁업자에게 빼앗기면서 사무실도 접었다.

강화도 집도 전세지만, 이곳으로 이사를 하면서 결심했다. 짜증 내지 말고 연극 영상을 만드는 시간 외에는 농사를 짓자고. 연금도 없는 노후에 대비해서 농사꾼 연습을 해두자는 것이다. 120㎡ 남짓한 텃밭에서 지금은 가지, 호박, 고추, 허브류를 기른다. 아내는 현지 초등학교 상담교사로 일하고 있고, 초등학교 4학년 딸 윤서도 집 근처 학교에 다니고 있다.

그는 “아내는 동갑인데 같이 연극을 볼 때가 많다. 딸은 ‘아빠 작품은 너무 예술적이어서 어렵다. 트와이스와 블랙핑크 콘서트 보여 달란다’고 한다”며 웃는다.

연극은 평생 할 만하다고 생각하는지 궁금했다.

“요즘 VR(가상현실)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지금은 영화보다 연극 쪽에 더 관심이 있다. 계속하고 싶다. 무대 영상은 어떤 식으로든 살아남을 것이다. 언제까지라고는 말할 수 없지만 할 수 있는 데까지는 해 보고 싶다.”

그의 말은 진심일까. 다음 말을 들으면 그런 것도 같다.

“연극에서는 고전이 좋다. 영화에서의 고전은 그저 공부의 대상일 뿐이었다. 그러나 연극에서는 나름대로 해석도 할 수 있고, 곱씹는 과정도 있다. 내가 언제 체호프를 이토록 열심히 공부해서 머릿속에 집어넣을 기회가 있겠는가. ‘고래 햄릿’과 ‘햄릿아비’를 할 때는 1년 내내 햄릿만 생각했다. 그런 시간들이 재미있고, 좋았다.”

그와의 인터뷰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말은 이것이다.

“새로운 사실을 알기 전과 후는 내 몸속의 분자가 하나라도 달라져 있을 것이다.”

(윤형철이 영상을 맡았던 연극 작품은 다음과 같다. ‘숲속의 잠자는 옥희’ ‘사라지다’ ‘빨간 시’ ‘살’ ‘과부들’ ‘날아다니는 돌’ ‘산전수전’ ‘카베세오’ ‘불량청년’ ‘담살이 의병장 안규홍’ ‘고래 햄릿’ ‘햄릿아비’ ‘벚꽃동산’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 등)

심규선 기자 ksshi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