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철희 논설위원
문 대통령의 ‘7·6 베를린 구상’ 발표 아흐레 만에 나온 북한 노동신문의 반응은 한술 더 떴다. “잠꼬대 같은 궤변” “철면피하고 누추하다”는 막말에 “맥도 모르고 침통 빼드는 얼치기 의생”에 비유했다. 이명박 박근혜 전 대통령에게 온갖 상스러운 언사를 내뱉던 북한이다. 문 대통령에겐 ‘남조선의 집권자’라고 칭하니 이 정도면 양반이다.
무늬만 같은 두 ‘伯林 연설’
사실 베를린 구상은 그 원조 격인 김대중(DJ) 전 대통령의 ‘베를린 선언’과 비교하면 조산으로 태어난 미숙아라는 평가를 받을 수밖에 없다. 2000년 3월 9일 DJ가 베를린자유대에서 연설을 하던 바로 그 시각, 싱가포르에선 박지원-송호경 간 남북 비밀접촉이 이뤄지고 있었다. 베를린 선언은 남북 간 사전 정지작업과 교감의 산물이었던 것이다.
1998년 2월 취임 직후 남북 대화에 나섰다가 실패를 맛본 DJ 정부는 우선 햇볕정책에 대한 미국의 전폭적인 지지를 확보하려고 노력했다. 빌 클린턴 대통령은 그해 6월 첫 한미 정상회담에서 “이제 한반도 문제는 김 대통령이 핸들을 잡아 운전하고 나는 옆자리로 옮겨 보조적 역할을 하겠다”며 DJ에게 운전석을 권유했다(임동원 ‘피스메이커’).
하지만 DJ가 실제로 운전석에 앉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당장 평안북도 금창리의 큰 지하땅굴이 비밀 핵시설이라는 의혹이 제기됐고, 대포동 1호 미사일까지 발사되면서 한반도는 위기에 휩싸였다. 그때 미국 대북정책조정관에 임명된 인물은 1994년 1차 북핵 위기 때 북폭(北爆)을 주장했던 강경파 윌리엄 페리 전 국방장관이었다.
이후 과정은 문 대통령의 6·15 남북정상회담 기념식 축사에, 특히 사전 배포된 원고에 연설 직전 추가된 한 대목에 잘 요약돼 있다. “김 대통령은 이런 위기를 극복하고 미국 클린턴 행정부를 설득하면서 남북관계가 발전할 수 있는 토대를 주도적으로 닦았다.” 미국 동의나 양해 없이 남북관계는 한 치도 진전될 수 없음을 문 대통령도 알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지금 문 대통령은 단 한 차례의 한미 정상회담으로 운전석을 확보했다고 믿는 것 같다. 당장 호응은 없어도 일관성을 보여주면 김정은 정권의 태도도 바뀔 것이라는 기대 아래 7·27 정전일, 8·15 광복절, 10·4 기념일로 이어지는 대북 제안 일정표를 고수할 생각인 듯하다. 하지만 북한이 ‘핵 무기화 일정표’를 양보할 가능성은 있을까. 이러다 미국마저 베를린 구상을 한낱 몽상으로 치부하는 건 아닌지, 그게 걱정이다.
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