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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기획]왜군 허위공작에 넘어간 선조, 아비규환 참패 자초

입력 | 2017-07-29 03:00:00

잊혀진 전쟁 ‘정유재란’ <4>
4화: 조선 조정, 이순신을 버리다




거제도 본섬(오른쪽)과 칠천도(왼쪽) 사이의 칠천량 바다. 1597년 7월 칠천교 부근에서 원균이 이끄는 조선 수군과 왜군의 치열한 격전이 벌어졌다. 거제=박영철 기자 skyblue@donga.com

“저 바다로 무식한 칼잡이놈(가토 기요마사)이 곧 건너온단 말이지. 그냥 내버려둘 순 없다.”

1596년 12월 초, 조선 부산포(부산시 부산진역과 자성대 일대)의 왜성. 왜군 장수 고니시 유키나가는 성 지휘소인 천수각에서 부산포 앞바다를 노려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자신과 경쟁 관계인 왜장(倭將) 가토를 말할 때 늘 ‘무식한 칼잡이’라고 호칭하는 고니시는 생각할수록 분했다.

고니시는 명나라와 일본 간의 강화협상(임진왜란 종전협상)을 깬 배후로 가토를 의심했다. 그해 9월 초, 조선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4년간 끌어오던 강화협상이 막 성공하려던 참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갑자기 태도를 바꾸었다. 명나라 책봉단이 오사카성에서 히데요시를 일본 국왕으로 인정하는 책봉식을 끝내고 귀국길인 사카이(堺)에 도착한 도중에 벌어진 일이었다. 히데요시는 조선의 남부 4개 도에 대한 영유 권리를 명나라로부터 보장받지 못했다며 협상을 깨버렸다(‘16·17세기 예수회일본보고집(イエズス會日本報告集)’ 第1期 第2卷).

협상 실패의 주범으로 몰려 히데요시의 눈 밖에 난 고니시는 재침(정유재란)을 준비하는 명목으로 조선에 들어왔다. 고니시는 이 모든 게 평소 자신이 주도하던 강화협상에 대해 비판적이던 가토가 개입되지 않고서는 벌어질 수 없는 일이라고 판단했다.

고니시의 곁에서 시중을 들던 심복 요시라는 ‘주군이 이번 기회에 가토를 제거하려 마음먹었다’고 판단했다. 요시라는 쓰시마(對馬) 섬 출신의 왜인으로 원래 부산포를 왕래하던 장사꾼이었다. 그는 전쟁이 발발하자 조선말에 능하다는 이유로 고니시에게 발탁돼 통사(通事·통역관)로 활동해왔다. 조선군과 왜군 사이를 오가면서 이중 첩자 노릇도 했다. 조선 측에서도 요시라가 간자(間者·간첩)임을 알면서도 은자(銀子)를 제공하며 왜군 동향 정보를 수집하곤 했다.

1596년 12월 11일, 요시라가 경상우병사 김응서의 진영에 나타났다.

“우리 장군(고니시)이 가토와 사이가 좋지 않은 것은 알고 계실 것입니다. 장군은 ‘이번에 강화가 깨진 것은 가토 때문이다. 나 또한 그를 제거하고 싶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며칠 후 그가 바다를 건너올 예정이라 합니다. 수전에 뛰어난 조선 군사가 나선다면 반드시 이를 격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놓치지 마십시오.”(‘징비록’)

요시라는 이후 고니시의 밀서를 김응서에게 건넸다. 밀서는 가토 군의 해상 이동 경로, 도착 예정 날짜, 그에 대한 조선 수군의 대비책까지 구체적으로 담고 있었다. 고니시는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수군을 이용해 가토의 조선 상륙을 방해하려고 계획했다. 가토는 히데요시에게 “이번 출격 한번으로 조선을 완전히 평정할 수 있다”고 호언장담하며 병마(兵馬)를 요청했었다. 그런 가토가 조선 수군 때문에 바다를 건너지 못하면 히데요시의 노여움을 사 죄를 받을 수밖에 없다(‘선조실록’). 고니시는 주전파(主戰派)인 가토가 벌을 받으면 주화파(主和派)인 자신이 다시 힘을 얻을 수 있다고 판단했다.

고니시에게는 또 다른 속셈도 있었던 것으로 해석된다. 미리 대기한 조선 수군에게 가토가 겁을 먹고 물러나면 애초의 계획대로 성공한 셈이 된다. 반면 가토가 위험을 무릅쓰고 상륙하려다 공격을 당할 경우 부산포의 다른 아군(왜군)들이 지원에 나설 수밖에 없다. 이들이 연합해 조선 수군과 전투를 벌일 경우, 막강한 조선 수군의 전력을 약화시킬 수 있을 것이라는 계산도 한 것이다.

히데요시는 조선을 점령하기 위해서는 먼저 이순신과 조선 수군을 제압해야 한다고 강조해 왔다. 임진왜란 내내 조선 수군에게 당하기만 했던 일본 측도 그간 조선 판옥선에 대응하기 위한 대형 함선인 아타케부네를 많이 만들었고, 조선 수군의 전술과 조선의 물길 등을 치밀하게 연구해 두었다.

고니시의 계책은 김응서를 통해 즉시 조선 조정에 보고됐다. 선조와 대신들은 고니시의 계략이 아닌가 하고 오랫동안 숙의했다. 결국 왜군 강경파인 가토를 제거하는 게 조선에 유리하다고 판단했다. 해를 지나 1597년 1월 2일, 선조는 김응서와 이순신에게 동시 출병을 명령했다.

결과는 어찌 됐을까. 이순신은 왜장 고니시의 정보만을 믿고 출병할 수 없다며 반대했다. 정보의 중요성을 누구보다도 잘 인지하고 적극적으로 활용해온 이순신이지만, 가토 출병에 대한 정보는 고니시와 요시라의 간계라고 보았다. 하지만 이순신은 조선 조정이 간계에 속아 넘어가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공개적으로 이를 표현하진 못했다(이충무공 ‘행록’). 당시 조정은 서인(西人)들이 득세해 동인(東人)인 유성룡이 천거한 이순신을 비방하던 때였다.

이순신은 가토의 조선 출병 정보가 사실이라 하더라도, 부산포 일대에 여전히 주둔 중인 일본 육군과 대마도에서 건너오는 가토의 대군이 수륙 양면으로 협공해 들어올 경우, 조선 수군도 승산이 없다는 논리를 내세웠다. 실제로 당시 왜군 2만여 명이 강화협상 중에도 부산포, 안골포, 가덕도, 죽도, 서생포 등지의 왜성에 주둔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또 겨울에는 배의 노를 젓는 격군(노꾼)을 풀어주기 때문에 배를 움직일 수군이 부족하다는 현실적인 이유도 들었다. 격군은 한번 배에 오르면 교대가 잘 되지 않고, 고된 노역과 질병으로 최고의 병역 기피대상이었다. 이순신은 판옥선 한 척을 움직이는 데 격군이 평균 100명이 필요하기 때문에 만성적인 격군 부족에 시달렸다. 그래서 수군 활동이 거의 없는 겨울에는 고향으로 돌려보냈다가 이듬해 봄에 다시 모집하는 방식으로 격군을 운영했다.

치밀한 성격의 이순신은 적장이 시키는 대로 병력을 움직이는, 고금(古今)에 없는 일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전쟁에서는 지상담병(紙上談兵·종이 위에서 병법을 논함)보다는 장수의 현장 경험과 판단을 존중해주는 게 관례이기도 했다.



동인과 서인 갈등 이용한 고니시

결국 가토의 군대는 해상에서 아무런 제재를 받지 않고 1597년 1월 12일에서 14일에 걸쳐 울산 서생포와 부산 다대포에 상륙했다. 이순신을 이용해 가토를 제거하려던 계획이 실패한 고니시로서는 히데요시의 눈에 들기 위해서는 조선에서 전공(戰功)을 세우는 외에 다른 대안이 없었다.

“요시라, 조선의 대신들이 이순신을 좋아하는 쪽과 싫어하는 쪽으로 갈라져 있다지?”

“예. 김응서 장군도 주군님의 정보를 거부한 이순신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고니시와 요시라는 ‘이순신 제거 작전’에 들어갔다. 요시라는 통사의 자격으로 조선 진영을 드나들면서 이순신을 헐뜯는 헛소문을 퍼뜨리고 다녔다.

“청정(淸正·가토)이 단 한 척의 큰 배로 건너오다가 바다 가운데서 바람을 만나 작은 섬에 며칠 동안 정박하였는데, 내가 급히 통제사 이순신에게 통지하여도 통제사가 의심하고 두려워하여 오지 않아서 일을 그르쳤소.”(‘난중잡록’)

또 1월 23일에는 경상도위무사 황신과 김응서의 장계가 동시다발적으로 조선 조정에 올라왔다. 두 사람의 장계는 공통적으로 “조선의 일은 매양 그렇다. 기회를 잃었으니 매우 애석하다”는 고니시의 말을 전하면서, “우리(조선)가 기회를 그르쳤으니 매우 통한스럽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렇잖아도 이순신에 대한 좋지 않은 소문을 듣고 있던 선조는 장계를 본 후 공개적으로 이순신을 비난했다.

“왜추(倭酋·고니시)는 손바닥을 보이듯이 가르쳐 주었는데, 우리는 해내지 못했으니 우리나라야말로 정말 천하에 용렬한 나라이다. 지금 장계를 보니 조선의 일은 매양 그렇다고 행장(行長·고니시) 역시 조롱까지 하였으니 우리나라는 행장보다 훨씬 못하다. 한산도(閑山島)의 장수(이순신을 가리킴)는 편안히 누워서 어떻게 해야 할 줄 몰랐었다.”(‘선조실록’)

선조의 말에 윤두수, 이산해 등 이순신을 고깝게 여기는 대신들도 맞장구쳤다. 마침내 2월 6일 선조는 이순신 체포령을 내렸다.

그런 줄도 모르고 이순신은 2월 10일 전선을 이끌고 부산포로 진격해 사흘간 왜군을 공격하고 있었다. 이순신은 왜군 본거지를 아예 쳐부수기로 결정한 것이다. 이순신은 해안에 늘어선 왜의 전선들에 총포와 화포 등을 쏘아 불태워 없앴다. 이순신을 두려워한 왜군들은 전선을 이끌고 바다로 나올 생각을 못했다. 그저 육지에서 철포 등을 쏘며 대항할 뿐이었다. 이것이 절영도(부산 영도) 앞바다에서 벌어진, 이순신의 알려지지 않은 부산포 진공 승첩이다.

그러나 이순신은 전선을 이끌고 한산도 본영으로 귀환하던 중 선조가 보낸 선전관에게 체포되고, 3월 4일 한양으로 끌려와 감옥에 갇혔다. 결과적으로 고니시는 조선 조정의 내분을 부추겨 가토보다 더 두렵고 미운 이순신을 손쉽게 제거한 셈이다.

고니시와 요시라의 행적을 기록한 ‘난중잡록’의 저자 조경남은 “요적(要賊·요시라)이 전후에 행한 바가 모두 우리를 속이는 일인데도 우리나라는 알지 못하였으니 통탄할 만한 일”이라고 했다. ‘징비록’의 저자 유성룡도 고니시의 말을 액면 그대로 믿은 조선 조정과 고니시의 정보를 여과 없이 전달한 김응서에 대해 비판적 태도를 보였다.



아비규환의 참패로 치닫는 원균의 수군

23일 기자는 고니시가 머물던 부산포왜성에서 코앞에 보이는 영도를 바라보며 이순신의 부산포 진공 작전을 머릿속에 그려봤다. 사실 이 전투는 매우 위험한 작전이었다. 이순신은 적들이 빤히 보이는 영도에서 사흘간 머물면서 요새화된 왜군 진지를 공격했다. 자칫하면 역공을 당할 정도로 왜군들이 밀집된 곳이었다. 이순신이 탄 상선(통제사가 타는 판옥선)이 적진 가까이 다가가 썰물이 온 것도 모를 정도로 맹공을 하다가 배 밑창이 땅에 닿아 왜군에게 배를 뺏길 뻔한 적도 있었다.(‘선조실록’)

원균은 이 일을 가리켜 이순신이 왜적의 비웃음만 샀고, 별로 이익을 거두지 못했다고 모함했다. 하지만 이순신은 부산포 앞바다에서 무위(武威)를 과시함으로써 적들의 바닷길 통행을 막으려 했던 것이다. 가토의 선단을 공격하라는 애당초의 명령은 따를 수 없었지만, 궁극적으로는 적들의 바닷길 통행을 막으라는 조정의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위험한 작전을 편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부산포 앞바다를 완전히 장악할 만큼 승리했다. 비록 조정은 승리한 전투로 인정해주지 않았지만….

이튿날인 24일 새벽, 기자는 왜성이 들어섰던 가덕도를 거쳐 거제도의 칠천교에 도착했다. 칠천교는 칠천량 바다를 가로질러 거제도 본섬과 칠천도를 이어주는 다리다. 칠천량 바다는 이순신 대신 원균이 이끌던 조선 수군이 처참히 무너진 우리 역사의 아픈 현장이다.

420년 전인 1597년 7월에는 물론 다리가 없었다. 다리 아래 바다에서는 조선 수군을 태운 150척 안팎의 판옥선이 물속으로 가라앉거나 이리저리 표류하고 있었을 것이다. 갑자기 칠천교 다리 위로 짙은 해무가 덮쳐 왔다. 잠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조그마한 왜선 5, 6척에 조선의 거대 함선들이 속수무책으로 당한 게 앞을 가리는 이런 기상 때문이었을까?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통틀어 조선 수군 유일의 참패이면서, 조선을 다시 한번 아비규환의 생지옥으로 만든 비극이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됐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됐던 것일까.

부산·거제=안영배 전문기자 oj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