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트렌드 생활정보 International edition 매체

[광화문에서/윤완준]이병호-김양건의 비밀회동

입력 | 2017-08-02 03:00:00


윤완준 베이징 특파원

박근혜 정부 3년차인 2015년 12월 하순. 이병호 당시 국가정보원장과 김양건 북한 대남 비서 겸 통일전선부장이 남북 아닌 제3국에서 극비리에 회동했다. 지난해 상반기 단서를 잡고 취재를 시작하자 청와대는 강하게 부인했다. 하지만 박근혜 정부가 끝난 뒤 만난 당시 관련 당국자들은 조심스럽게 시인했다.

국정원-통전부의 수장이 나선 것으로 볼 때 양측은 남북 정상회담을 타진한 것으로 추정된다. 남측은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해서라도 정상회담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것 같다. 북한도 이런저런 대화 조건을 제시했을 것이다. 하지만 탐색전 이상은 어려웠다. 양측은 특별한 합의 없이 헤어졌다. 결렬은 아니어서 2016년 초 2차 접촉을 기대했다.

하지만 중국 베이징(北京)에 갔던 북한판 걸그룹 모란봉악단이 첫 공연을 몇 시간 앞둔 12월 12일 돌연 평양으로 귀국한 게 불길한 징조였다. 같은 날 개성공단에서 열린 남북 차관급 회담에서 북측은 남측이 북핵 문제를 꺼내자마자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3일 뒤 김정은은 수소탄 실험을 은밀히 지시했다.


김정은의 지시 사실을 모른 채 성사된 국정원-김양건 라인의 비밀접촉 일주일여 뒤 사건이 터졌다. 북한이 12월 29일 김양건이 평양에서 교통사고로 죽었다고 밝혔다. 북한은 2016년 1월 6일 핵실험을 감행하면서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새로운 도발의 사이클을 시작했다.

남북 정상회담까지 추진했던 평양의 대화파와 핵미사일 도발을 주장한 군부 강경파가 대립했고 2015년 12월 강경파가 대화파를 제압했다는 추정이 가능하다. 그렇다면 김양건은 그냥 죽은 게 아니다. 살해당한 것이다.

2015년 8·25 남북합의 이후 4개월 남짓 이어진 ‘박근혜 정부의 비밀 남북대화’ 국면은 진상이 더 밝혀져야 한다. 하지만 한반도를 둘러싼 미국과 중국이 남북대화를 지지한 것이 큰 동력이었다는 데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한미는 10월 정상회담에서 남북대화 필요성에 공감했다.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은 그해 9월경 고위 관료를 평양에 비밀리에 보낸 것으로 알려졌다.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도 그해 10월 공산당 서열 5위 류윈산(劉雲山)을 북한에 보내 김정은을 달랬다.

문재인 정부는 박근혜 정부보다 남북관계 개선에 적극적이고 대화에도 더 열려 있다. 북한이 연이어 대륙간탄도미사일(ICBM)급 미사일을 쏜 뒤에도 청와대는 남북대화 기조만큼은 이어가려 한다. 하지만 지금의 미중은 2015년 12월과 다르다. 남북대화에 우호적이지 않다.

6월 말 한미 정상회담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남북대화를 지지했다고 밝히자 주펑(朱鋒) 난징대 국제관계연구원장은 “구체적인 대화 조건에선 이견이 생길 것”이라고 지적했다. 예측은 빠르게 현실화됐다. 정부가 남북대화를 제의하자 트럼프는 금방 불편한 기색을 드러냈다. 중국은 말로 남북대화를 지지하지만 행동으로 추동하지 못한다. 대북관계가 최악인 지금 자신들도 고위급 교류가 없다.

한반도 문제에 정통한 중국인 C 씨는 “지금은 대화할 때가 아니라 압박할 때”라고 말했다. 이어 “김정은이 무엇을 가장 두려워하는가. 한미중일러의 북한 문제 협력이다. 무엇을 가장 원하는가. 분열”이라고 설명했다. 스인훙(時殷弘) 중국 런민대 교수도 “한미중이 싸우면 김정은만 웃는다”고 했다.

정부 당국자도 “당분간은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대북 제재의 흐름에 동참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고 한다. 북한과의 대화는 필요하다. 하지만 미중 충돌, 한중 갈등, 한미 엇박자를 방치하면 제대로 협상할 기회는 임기 내 오지 않는다.
 
윤완준 베이징 특파원 zeitu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