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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바이 서울!/이한일]이제 김장 배추만 남았다

입력 | 2017-08-04 03:00:00


이한일

한여름 밤의 꿈만 같다. 아침저녁으로 어제는 고추밭 감자밭, 오늘은 오미자밭, 내일은 정원에 물을 주느라 하루가 어떻게 가는지 몰랐고 비는 이제 잊혀져 가고 있었는데 갑작스럽게 장마가 찾아왔다. 150mm, 200mm 그렇게 사흘씩 나흘씩 쉬지 않고 쏟아부었다.

새벽에 일어나 밭고랑을 살피고 밤중엔 랜턴을 들고 배수구 정비를 했다. 지난해 더덕밭 한가운데가 쓸려나가 커다란 계곡이 만들어졌던 기억 때문에 금년엔 더욱 신경이 쓰였다. 다행히 그런 피해는 없었지만 그래도 여기저기 난리다. 하우스 안에 물이 차고, 물이 덜 빠진 고추밭 일부엔 탄저병이 왔다. 가뭄을 버티느라 그렇게 힘들어했던 작약은 긴 장마에 아예 작살이 났다. 살아남은 놈이 20%도 안 된다.

봄부터 7월 초까지 긴 가뭄으로 잡초들이 지쳐서 제대로 자라질 못했다. 생각날 때마다 호미로 제초작업을 하면 됐다. 그러던 것이 장마가 끝난 지금은 가슴까지 자랐다. 정글이 따로 없다. 장마 기간에 잠시 비가 멈춘 틈을 타 제초작업을 한 번 했는데도 이렇게 난리다. 매실 과수원은 예초기로, 오미자와 블랙커런트밭은 호미로, 고추 등의 헛골은 괭이로 긁어낸다. 아내와 둘이 나름대로 열심이지만 보통 작업이 아니고 끝이 있는 작업도 아니다.


보다 못해 엊그제 오미자 하우스로 가는 길은 제초제를 쳤다. 어떨까 싶은 마음으로 조심스레 살포했다. 작년 처음으로 농사를 시작할 때 제초제는 절대 안 쓰겠다던 마음을 거의 접었다. 올해같이 장마가 길어지면 호미, 괭이로는 안 될 것 같다. 낫으로 호미로 제초작업을 하면 지나던 이웃 분들이 빙그레 웃으며 “힘들어서 못해요. 멀칭을 하고 약을 쳐야 해요”하던 말들이 이제야 절실히 와 닿는다.

가뭄도 장마도 금년은 유달리 길었다. 장마가 끝나더니 바로 폭염이다. 다행히 해가 지면 기온이 뚝 떨어져 새벽녘에는 서늘한 덕에 또 하루를 기운차게 시작할 수 있어 좋다.

8월이다. 돌이켜보면 정말 한여름 밤의 꿈같다. 가뭄과 장마 그리고 폭염. 여러 일상이 순식간에 겹쳐 지나간다.

그래도 감자를 알차게 수확해 몇몇 집과 나누었고 옥수수도 잘 영글어가고 있다. 지난 초복 때 저 아랫집 부부가 들깨 모종을 들고 찾아왔다. 마침 밤새 퍼붓던 비가 점심 무렵 잠시 주춤한 터라 밤나무 그늘에 앉아 막걸리 한잔을 나누다가 감자밭이 눈에 띄자 그들이 깜짝 놀라며 소리를 지른다. 아직껏 감자를 안 캤느냐며. 장마 전에 캐지 않으면 썩는다고 한다.

잠시 멈추었던 비가 다시 내리기 시작했지만 그 부부는 호미를 찾더니 밭으로 달려가 감자를 캐내고 밭을 정리한 후 들고 온 들깨 모종을 심어 주었다. 밤에 아내와 덱에 앉아 소주잔을 기울이다가 서로 마주 보고 한바탕 웃었다. 이웃이 없었다면 우린 어떻게 되었을까 하고….

이제 들깨도 심었고 곧 옥수수를 수확하면 김장 배추만 남았다. 배추, 무, 갓, 쪽파 파종 준비를 해야겠다. 올해도 또 하나를 배우고 있다.
 
이한일

※필자는 서울시청 강동구청 송파구청에서 35년간 일하다 강원 홍천으로 이주해 농산물을 서울에 소개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