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진 전쟁 ‘정유재란’<5> 5화: 전쟁 물줄기 바꾼 칠천량 참패
칠천량해전공원(왼쪽 하단) 상공에서 바라본 칠천대교(가운데 상단)와 칠천량 해협. 폭이 좁아 거센 물길이 형성돼 있다. 거제=박영철 기자 skyblue@donga.com
히데요시가 그렇게 좋아할 만도 했다. 칠천량 해전은 정유재란의 판도를 바꿔놓았다. 참패한 조선은 물론이고 명나라와 일본의 전쟁 지휘 수뇌부도 예상 밖의 해전 결과에 전쟁 전략을 새롭게 짰다. 왜군의 조선 내륙 유린이 본격화했다. 정유재란의 처절한 고통은 사실상 칠천량 해전부터 시작됐다는 평가도 이런 이유에서다.
칠천량은 거제도 본섬과 칠천도 사이의 조그마한 해협이다. 칠천대교(길이 425m)를 통해 두 섬을 건너다닐 수 있을 정도로 수로가 좁다. 한산도 해전의 견내량(거제대교 740m), 명량해전과 노량해전이 벌어진 명량해협(진도대교 484m)과 노량해협(남해대교 660m)보다 폭이 좁다 보니 바닷속 물길이 매우 거세다. 이 위험한 해협에서 전투를 지휘한 수군 총사령관이 원균이다.
왜장의 간계에 또 넘어간 조선 조정
이순신과 원균이 삼도수군통제사로 근무한 삼도수군통제영(통영시). 통영=박영철 기자 skyblue@donga.com
그런 즈음 조선 조정의 내분을 이용한 간계로 이순신을 쫓아내는데 성공한 간자(間者) 요시라가 또 경상우병사 김응서를 찾아왔다. “정유년(1597년) 6월 그믐께나 7월 초에 일본의 대병(大兵)이 일시에 바다를 건널 것”이라고 정보를 흘렸다.(‘선조실록’) 조선 수군을 부산포로 유인해 옭아매려는 왜군 선봉장 고니시 유키나가의 술책이었다. 고니시는 부산포 앞바다가 조선 수군에게 불리한 여건임을 이미 파악하고 있었다. 식사 및 휴식을 위해 정박할 만한 곳이 마땅치 않고, 움직임이 그대로 노출돼 앞뒤로 일본 수군에게 포위당할 경우 꼼짝없이 당할 수 있는 해역인 것이다.
당시 조선은 육군 장군으로만 알려진 고니시가 수로와 바닷길에도 일가견이 있는 장수임을 눈치채지 못했다. 예수회 선교사 루이스 프로이스는 로마 교황청에 보내는 문서(1584년)에서 고니시를 일본 세토(瀨戶) 내해(內海)의 해상로를 장악한 ‘바다 사령관’이라고 소개했었다. 고니시가 임진왜란 때 왜군 선봉에 서서 대한해협을 일착으로 건너온 것도 이런 배경 때문이었다.
원균은 한동안 출병을 거부했다. 앞서 2월 이순신이 체포되기 직전 벌인 부산포 진공 작전은 왜군이 겁을 내는 이순신이기에 그나마 가능한 전투였음을 원균은 알고 있었다. 원균은 부산포 앞바다로 수군이 곧장 진격하면 위험하니, 안골포와 가덕도 등에 있는 왜군들을 조선 육군 쪽에서 먼저 쳐야 한다는 이유를 대며 출병을 미뤘다.
조정의 압력은 거세졌다. 선조도, 하삼도(下三道·전라 경상 충청)의 군정 책임자인 도체찰사 이원익도, 조선군 총사령관인 도원수 권율도 한결같이 원균이 부산포 앞바다로 나가서 싸우길 강력하게 요구했다. 조선 수군의 배가 부산포 앞에서 왔다 갔다라도 해야 대마도에서 출발한 왜군들이 바다를 쉽게 건너오지 못할 것이라는 이유를 댔다.
결국 원균은 7월 14일 수군의 본영인 한산도 통제영에서 부산포로 진격했다. 아시아 최강을 자랑하는 주력 전함인 판옥선 150척 내외, 판옥선마다 한 척씩 딸린 사후선, 소형 전투선인 협선, 탐망선과 연락선 등을 합치면 족히 300척이 넘는 대함대였다. 수군만도 1만3000여 명이었다. 왜군은 1000여 척에 이르는 전선을 안골포, 가덕도, 웅포 등에 집결시킨 채 대비하고 있었다. 육지의 왜군들도 언제든지 출격할 수 있는 전투태세를 갖추었다.
원균은 즉시 공격 명령을 내렸다. 조선 판옥선들은 적진을 향해 부지런히 노를 저어갔다. 그러나 왜군들은 판옥선보다 가볍고 날렵한 세키부네 함선으로, 빠르게 접근해 왔다가 달아나기를 반복하는 수법으로 조선 수군을 지치게 했다. 저녁이 되자 바람이 불고 파도가 거세지면서 12척의 판옥선이 풍랑에 휩쓸려 표류하고 말았다. 원균은 함대를 겨우 수습해 가덕도로 회항했다. 탈진한 조선군은 가덕도에 닿자마자 마실 물부터 찾았다. 군사들이 허둥지둥 물을 찾아다니는 순간 갑자기 섬에서 왜적들이 나타나 덮쳤다. 왜군의 매복공격으로 결국 400여 군사를 잃고 원균은 칠천도로 갔다.(‘징비록’)
적장이 귀띔한 해상 전술 이용도 못해
조선 수군의 움직임을 손바닥 들여다보듯이 파악하고 있던 왜군은 1000여 척의 전선으로 칠천량 일대를 겹겹이 포위했다. 그리고 인근 섬과 육지에 육군을 배치해 매복 작전을 펼쳤다. 시마즈 요시히로가 이끄는 일본 육군은 가덕도에서 출발해 거제도에 도착한 뒤 육로를 이용해 조선군을 공격하기로 했다. 이틀 동안 계속된 악천후 속의 항해로 피로와 기갈이 겹쳤던 조선군은 경계를 제대로 하지 않아 포위당한 것도 모르고 있었다.
그날 밤 왜군의 척후선이 판옥선 4척에 불을 지르고 달아났다. 우왕좌왕하는 조선군들을 지켜본 왜군들은 16일 새벽 4시경 전면 공격을 했다. 이 전투에 원균과 함께 행동한 선전관 김식은 이렇게 묘사했다.
“15일 밤 이경(二更·21∼23시)에 왜선 5, 6척이 불의에 내습하여 불을 질러 우리 전선 4척이 전소하여 침몰되자 제장이 창졸간에 병선을 동원하여 어렵게 진을 쳤는데 닭이 울 무렵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왜선이 몰려와서 서너 겹으로 에워싸고 여러 섬에도 가득 깔렸습니다.”(‘선조실록’)
새벽이 되면서 칠천량 해협에서 탈출하려는 조선 함대와 이를 막으려는 일본 함대의 격전이 전개됐다. 판옥선이 여기저기서 불타며 침몰했고, 조선 수군은 배에 오른 왜군의 칼날에 목이 베여 나갔다. 전라우수사 이억기와 충청수사 최호는 현장에서 최후를 맞이했다. 배를 버리고 육지에 오른 조선 수군은 탈출로를 찾아 헤매다가 매복해 있던 왜군들에게 속절없이 당하고, 또 당했다. 이날 전투로 조선군의 크고 작은 배 160여 척이 빼앗기거나 파괴되고, 조선 수군 수천 명이 참획당했다.(‘정한록’)
왜군의 이러한 작전은 새로운 것도 아니었다. 임진왜란 강화협상 과정에서 조선 측과의 협상 파트너였던 야나가와 시게노부는 조선 측 역관 이언서에게 왜군의 전술을 은근슬쩍 알려주기도 했다.
“조선의 수군이 차츰 수전(水戰)을 익히고 선박도 견고하니 피차가 맞서서 싸운다면 이기기가 어렵지만, 만약 어두운 밤에 몰래 나가서 습격하되 조선의 큰 배 한 척에 일본은 작은 배 5, 6척 내지 7, 8척으로 대적하고, 시석(矢石)을 무릅쓰고 돌진하여 일시에 붙어 싸운다면 조선 수군도 격파할 수 있다.”(‘선조실록’ 1596년 12월 21일자 기사)
그러나 원균은 왜군이 노출한 전술을 활용하기는커녕 작전 지휘가 어려울 정도로 혼미한 상태에 있었던 것 같다. 당시 현장 전투에 참여해 왜군에 잡혀가기도 했던 김완은 ‘용사일록’에서 원균이 술에 취한 채 대장선에 누워 호령만 하고 있었다고 기록했다.
원균은 가까스로 고성 춘원포에 당도한 뒤 대장선을 버리고 뭍에 올랐다. 원균은 산길을 따라 도망치다가 소나무 밑에서 쉬는 사이 추격해온 왜적에게 최후를 맞은 것으로 보고되었다. 그러나 탈출해 고향에 숨어 살았다는 얘기도 있다. 권율이 조정에 보고한 바에 의하면 권율의 군관 최영길이 사지(死地)를 벗어나 진주로 향하는 원균을 만나 얘기를 나눴다고 했다.(‘선조실록’)
경상우수사 배설은 용케 칠천량을 빠져나왔다. 그가 이때 챙긴 판옥선들이 뒷날 이순신의 수군 재건에 밑천이 된다. 바로 ‘소신(이순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있다’는 바로 그 배들이다.
왜군은 칠천량의 판옥선은 물론 연안의 진포마다 남겨진 조선의 배들을 죄다 탈취하거나 불태워버렸다. 조선 수군의 전 재산이 이때 다 털렸다. 무엇보다도 인명 손실이 컸다.
당시 판옥선 한 척에는 130여 명의 수군이 타고 있었고, 그중 약 62%인 80여 명이 노를 젓는 격군이었다고 한다.(‘한국선박사연구’) 판옥선은 전투가 벌어졌을 때 적정한 사거리에서 대형 화포를 쏘기 쉽도록 전후좌우 선회 등 배의 기동력 확보가 중요했다. 이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 격군이었다. 그런데 배가 침몰하면 배 아래쪽에 있던 격군들은 대부분 수장되기 일쑤였다. 선조 때 대신 이항복은 “충청수영에 있을 당시 한산도로 출격한 판옥선이 침몰해 83명이 떼죽음을 당해 한 마을이 온통 그 가족들의 통곡소리로 진동했다”고 하면서, “사람들이 이 때문에 사력을 다해 격군이 되기를 회피하려 한다”고 말했다.(‘선조실록’) 당시 격군들은 전라도 연해에 사는 사람들이 주로 차출돼 큰 희생을 치렀다. 격군이 되면 반드시 죽는 것으로 여겨 미리부터 통곡 소리가 나올 정도였다.
고된 노역과 희생을 치르는 것은 격군뿐만 아니었다. 배에서 화살을 쏘는 사부(射夫), 포를 쏘는 포수(砲手) 등 다른 수군들도 일단 수군에 편입되면 집으로 돌아갈 수가 없어서, 군역을 피해 서울로 도피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수군 부족 때문에 노비 등 천민들을 수군으로 모집할 정도였다.
기자는 지난주 해전 현장을 답사하다가 칠천량해전공원 전시관에서 본 영상물이 잊혀지지 않는다. 수군을 지원하면 관노(官奴)에서 면천해준다는 말에 판옥선 사부가 된 ‘도치’가 왜군의 조총을 맞아 바닷속에 수장되는 장면이었다. 도치는 자식을 노비 신분에서 벗어나게 해주기 위해 전쟁에 나섰건만, 아무것도 보상받지 못한 채 목숨을 잃었다. 그 시절 조선의 바다를 지켰던 백성들의 삶은 다 그랬을 것이다. 그뿐이랴. 칠천량 해전의 패전은 그 후 내륙, 특히 호남의 수많은 백성들을 처참한 살육의 아비규환으로 내모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그 고통은 임진왜란보다 몇 곱절 처절했다. ‘선조실록’의 기록자는 이렇게 말했다.
“그 죄를 누가 책임져야 할 것인가. 한산(칠천량)에서 한 번 패하자 뒤이어 호남(湖南)이 함몰되었고, 호남이 함몰되고서는 나랏일이 다시 어찌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시사(時事)를 목도하건대 가슴이 찢어지고 뼈가 녹으려 한다.”
거제=안영배 전문기자 oj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