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랑새호’의 태평양 횡단 성공 소식이 실린 동아일보 1980년 8월 7일자 1면.
‘6일 아침. 안개가 자욱이 깔린 수평선 위에 섬 하나가 빠끔히 드러났다. “육지다! 육지! 만세!” 우리는 두 주먹을 불끈 치켜 올리면서 무의식중에 고함을 쳤다. 그러나 서로 무슨 말을 했는지 알지 못했다. ’파랑새‘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마지막 피치를 올리기 시작했다. 장장 75일 간의 멀고 험난한 항해가 대단원의 막을 내리는 순간을 향하자 선체마저 부르르 떠는 듯했다.’(동아일보 1980년 9월 6일자 ‘격랑 헤친 파랑새 75일 수기 20회’ 중 일부.)
1980년 8월 6일(현지시간) 미국 로스앤젤레스 남쪽 샌타모니카의 마리나 델레이 요트항에 요트 한 척이 도착했다. 울산 현대조선소 제3독을 떠난 지 75일만이었다. 스물여덟 살 두 젊은이 노영문 이재웅 씨가 탄, ‘파랑새’라는 이름이 적힌 길이 10m 요트였다. 파랑새호 프로젝트는 동아일보 창간 60주년 기념사업이기도 했다.
동아일보DB 파랑새호의 두 요트맨. 노영문(왼쪽), 이재웅 씨.
일엽편주로 바다를 건너기란 모험이었다. 앞서 1977, 78년 두 차례에 걸친 요트의 태평양 횡단 시도가 실패로 끝난 터였다. 파랑새호의 항로 역시 출발부터 험난했다. ‘당초 울산을 출발해 부산 앞바다를 선회해 시모노세키로 향할 예정이었으나 역풍이 불고 백파가 일어 곧장 선수를 시모노세키로 향했으며 달이 뜨기 시작한 출범 당일 저녁 7시경 30분 간 3, 4m의 거친 파도에 시달렸다.’(동아일보 1980년 5월 24일자)
몰아치는 비바람에 10m 높이의 파도와 싸우면서 돛이 찢어지는 등 위기를 겪었다. 무풍지대에 갇혀 며칠을 꼼짝 못하기도 했다. 무전기 고장으로 20여 일 교신 불능 상태에 빠지면서 KAL기의 레이더가 파랑새호로 보이는 물체를 포착해 구조대와 해상경찰이 탐색작전을 벌이기도 했다. 다행히 파랑새호를 지나던 일본 어선을 통해 무사 항해중이라는 메시지가 전해지면서 절망은 희망으로 바뀌었다.
김지영기자 kimj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