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 강릉시 안인진 강릉통일공원에 전시된 북한 잠수함. 동아일보DB
이형삼 전문기자
예비역 육군소령 이종갑 씨는 요즘 경남 창녕의 인력사무소에서 일한다. 구직자들에게 농촌 일자리를 연결해준다. 농번기엔 자신도 밭일을 마다하지 않는다. 그는 “제대 후 10여 개 직업을 전전하느라 같은 명함 1통을 다 쓴 경우가 드물었다”며 머쓱해했다.
이종갑 소령은 그해 11월 5일, 공비 잔당 2명이 출몰한 인제군 용대리 연화동 작전에 투입됐다. 그는 유사시 대북 침투작전을 수행하기 위해 온갖 특수훈련을 거친 정예였다. 산악훈련 경험도 많아 강원도 산세를 손금 보듯 했지만 근처 숲에서 느닷없이 날아든 총탄이 왼팔을 관통했다. 팔꿈치에도 두 발을 맞았다. 함께 수색 중이던 장교 2명과 병사 1명은 급소를 맞고 절명했다. 위치가 노출된 공비들이 3시간 뒤 사살되면서 49일간 계속된 소탕전은 막을 내렸다.
군 병원에서 골반뼈를 잘라내 으스러진 팔뼈에 이식하는 수술을 받았으나 도무지 뼈가 붙질 않았다. 7개월을 허송하며 통사정한 끝에 민간병원에서 재수술을 받았다. 다리뼈와 혈관 일부를 잘라 팔에 이식하고 허벅지 살을 떼서 팔에 갖다 붙였다. 그제야 회복세를 보였다. 병원비의 상당액은 자신이 부담했다. 민간병원에 두 달 입원했는데 공상(公傷) 요양기간은 20일만 인정됐다. 진급점수가 높은 데다 공상까지 입고도 이듬해 진급심사에서 탈락하자 군복을 벗었다. 정수기 판매, 다단계사업, 보험설계사 등으로 생계를 꾸렸지만 주변에 민폐 끼치기 싫어 곧 그만뒀다. 국가보훈처가 알선해준 직장에선 “우리도 사람을 줄여야 할 판”이라고 하기에 발길을 돌렸다.
신경조직이 죽은 왼팔은 지금도 불편하다. 무거운 것도 못 들고, 누군가가 무심코 건드리거나 단단한 물체에 부딪히면 찌릿찌릿하다. 이곳저곳 살을 떼어 낸 두 다리는 흉터투성이다. 재활치료나 성형수술은 딴 나라 얘기였다. “상이군인은 전역 준비 기간도 없이 곧장 사회로 나온다. 먹고살기 바빠 그런 건 엄두도 못 냈다.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 같은 것도 우리 땐 사치로 여겼다”고 한다.
20년 전 얘기라고? 북한의 지뢰 도발로 다리를 잃은 두 부사관이 민간병원 입원 30일 이후엔 치료비를 자가 부담해야 한대서 국민의 공분을 산 게 꼭 2년 전 얘기다. 수류탄 폭발사고로 손을 잃은 병사가 자비로 의수를 사게 됐다는 사연도 전해졌다. 정부는 뒤늦게 군인연금법 개정, 군인재해보상법 제정에 나섰다. 그나마 다행이지만 군의 사기는 경제적 보상만으로 높일 수 있는 게 아니다. 사기 진작의 첫걸음은 ‘기억’이다.
북한에 강릉 사건은 치욕스러운 기억이다. 공비 26명 중 25명이 사살되거나 자살하고 1명은 생포됐다. ‘깊은 유감’과 재발 방지를 약속하는 외교부 사과성명까지 발표했다. 그런 북한이 관영매체를 통해 “원수님(김정은)께서 그들의 희생 20돌을 잊지 않으시고 유가족들을 평양에 불러 추모행사를 크게 진행하도록 은정을 베풀어 주셨다”고 선전했다. 공비들의 유해를 조국해방전쟁(6·25전쟁) 참전 열사묘에 안치했다고도 전했다. 승전처럼 포장한 패전이었다.
미국의 상이군인들은 ‘얼라이브 데이(Alive Day)’를 기념한다. 복무 중 심각한 부상을 입은 날이다. 다시 떠올리기조차 끔찍한 날이지만 죽음의 위기에서 살아남아 제2의 인생을 살게 됐다는 긍정적 의미를 부여해 그렇게 부른다. 국가를 위해 헌신한 이들은 국가가 치료, 재활, 직업, 교육, 주거 지원 등을 통해 끝까지 기억하고 책임진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이형삼 전문기자 han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