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전의 앙드레김. 동아일보 DB
앙드레 김의 청문회 출두 소식을 다룬 1999년 8월 24일자 동아일보
이 장면은 당시 TV 전파를 타면서 화제가 됐다. 온 국민이 가장 세련된 옷을 만드는 디자이너가 가장 토속적인(?) 이름을 쓴다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이었다. 헌정 사상 처음으로 특별검사(특검)제도를 도입한 이 로비 사건이 결국 흐지부지 끝나자 “검찰에서 밝혀낸 건 앙드레 김의 본명뿐”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당시 ‘김봉남’은 한국을 뒤흔든 세 글자가 됐다.
반면 동아일보는 1999년 8월 26일자 ‘기자의 눈’에 “선비는 호(號)로 작가는 필명(筆名)으로 부르는 것이 예의이듯 패션 디자이너 앙드레 김은 ‘앙드레 김’으로 부르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썼다. 앙드레 김은 나중에 ‘신동아’와 인터뷰에서 “그것(기자의 눈)을 읽다가 눈물이 핑 돌 정도로 뭉클했다”고 회고했다.
1999년 8월 26일자 동아일보 ‘기자의 눈’
앙드레 김은 그러면서 “그 기사를 써주신 기자님이 잘못 아신 부분이 있는데요. 저는 제 이름을 부끄러워한 적이 한번도 없어요. 사람들이 제 이름을 가지고 말할 때 굉장히 실망스럽고 서글펐어요. 부모님이 지어주신 이름을 부끄럽게 생각하는 사람은 지상에 없다고 생각해요. 그렇다고 해서 예명을 사용하는 게 이상할 것도 없고요. 연예인들 중에 예명으로 활동하는 사람들 많잖아요?”라고 덧붙였다.
그는 또 ‘무대의상 디자이너’라는 평에 대해 “제가 화가 중에 김기창, 천경자 선생님 너무너무 존경하는데요. 돈이 없어서 아직 작품은 구입하지 못했지만요. 앞으로 바람이 있다면 돈을 벌어 꼭 그분들 작품 한점씩 사서 집에 걸어놓는 거예요. 저처럼 그분들 그림을 직접 갖지는 못해도 미술관에서 그림을 보면서 기쁨을 느끼면 좋은 것 아닌가요? 의상도 마찬가지예요. 제 작품을 입지는 못하지만 쇼윈도에서, 패션쇼에서 그것을 보면서 아름다움을 느끼고 저런 옷을 입어볼 수 있게 해주는 것이 문화 아닌가요? 의상에는 꿈과 환상이 있어야 해요. 왜 꼭 입어야만 한다고 생각하세요?”라고 반문하기도 했다.
“앙드레의 작품은 사치스럽다는 評(평)을 해주시는 분이 더러 있다. 그것이 어떤 性格(성격)의 評(평)이건 남의 見解(견해)엔 우선 謙虛(겸허)한 姿勢(자세)로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限定(한정)된 條件(조건)을 최대한 살려서 옷을 아름답게 만들어내려는 내 노력이 이런 식의 無責任(무책임)한 한마디로 處理(처리)된다는 것은 創作(창작)세계의 一角(일각)에 몸담고 있는 자로서의 自負心(자부심)으로 볼 때 여간 서운하고 억울한 노릇이 아니다. ‘이왕이면 다홍치마’라는 俗談(속담)이 있듯이 이 같은 천으로 보다 화사하게 또 때로는 ‘고저스’하게 옷을 지어낸다는 것이 어째서 ‘사치’인지 奢侈(사치)의 개념이 아리숭해지기까지 하는 것이다.” (※고저스: gorgeous)
세상을 살다 보면 ‘최고’와 ‘가장 유명한’이 서로 아주 다른 의미가 될 때가 있다는 걸 깨닫곤 한다. 그런 점에서 앙드레 김은 이 두 수식어를 모두 써도 조금도 어색하지 않은 대한민국 패션 디자인의 아이콘이었다. 옷만 보고도 또 말투만 듣고도 그게 누구인지 거의 전 국민이 알아차릴 수 있는 패션 디자이너를 과연 우리는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옷 로비 사건 때 ‘봉남이 형’이라고 부르며 그를 조롱하던 매체조차 그가 국내 최고의 디자이너라는 사실만큼은 부인하지 못했다.
앙드레 김의 별세 소식을 전한 2010년 8월 13일자 동아일보
2010년 오늘(8월 12일)은 대한민국은 국내 최고이자 가장 유명했던 의상 디자이너 앙드레 김을 잃은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