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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잡史]도라지를 아교로 붙인 뒤… “인삼 사세요”

입력 | 2017-08-14 03:00:00

짝퉁 파는 ‘안화상’




조선 말기 서소문(소의문)의 모습. 조선 후기 대표적인 짝퉁 시장이 있었으나 1914년 철거됐다. 국립문화재연구소 제공

“도라지를 인삼으로, 까마귀 고기를 꿩고기로, 말고기를 소고기라고 속이는 자도 있고, 누룩에 술지게미를 섞고 메주에 팥을 섞는 자도 있다.…요즘은 소금이 귀한데 간신히 사고 보면 메밀가루를 섞었다.”(윤기·尹<의 ‘무명자집·無名子集’ 중 ‘협리한화·峽裏閒話’에서)

조선 후기 서울에는 세 군데 큰 시장이 섰다. 운종가(종로2가), 배오개(종로5가), 소의문(서소문동)이다. 그중에서도 난전(亂廛)이 난립한 서소문 시장은 짝퉁의 온상이었다. 짝퉁을 파는 상인이 바로 ‘안화상(=貨商)’이다.

조선시대 작가 이옥(李鈺·1760∼1815)의 ‘시장 사기꾼에 관한 기록(市奸記)’에 실상이 나온다. 서울내기 이생은 짝퉁 상인에게 속는 어수룩한 시골 사람을 비웃으며 자기는 절대 속지 않을 것이라 자부해왔다. 그런데 어느 날 시장에서 아이와 상인이 다투는 모습을 봤다. 상인은 아이가 가져온 물건을 열 푼에 넘기라 하고, 아이는 그 돈으로는 못 준다며 실랑이를 벌였다. 상인이 “훔친 물건이 아니냐”며 의심하자 아이는 상인에게 온갖 욕을 퍼붓고 달아났다. 이생이 아이의 물건을 보니 진귀한 황대모(黃玳瑁·바다거북 등껍질)였다. 이생은 아이를 달래어 물건을 열두 푼에 샀다. 알고 보니 물건은 염소 뿔로 만든 가짜였고, 아이는 상인의 아들이었다. 부자(父子)의 연극에 감쪽같이 속아 넘어간 것이다.

귀한 약재와 골동품에 짝퉁이 많았고, 가장 심한 것은 인삼이었다. 대동법이 시행되면서 인삼의 납품은 공인(貢人)이 담당했다. 인삼의 수요는 갈수록 늘었지만 화전(火田) 개간으로 인삼 산지는 줄고 있었다. 가격을 맞출 수 없었던 공인들은 도라지나 더덕을 아교로 붙이거나 인삼 껍데기에 족두리풀 가루를 채워 넣어 가짜 인삼을 만들었다.

쓰시마 번주가 조선 상인에게 사들인 가짜 인삼을 에도 막부에 바쳤다가 가짜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외교 문제로 비화했다는 기록도 전한다.

짝퉁은 정치적으로 이용되기도 했다. 1669년 중국에 사신으로 간 민정중은 명나라 마지막 황제 의종의 어필을 구해 왔다. ‘비례부동(非禮不動·예가 아니면 움직이지 말라)’ 네 글자였다. 송시열은 이 어필을 받아보고 감격하며 바위에 글을 새겼다. 그러나 이 어필 역시 진짜라고 보기 어렵다.

송시열이 세상을 떠난 뒤 ‘비례부동’을 새긴 자리에는 만동묘(萬東廟)가 들어섰다. 송시열의 문인들은 이곳에서 임진왜란 때 구원병을 보낸 명나라 신종(神宗)과 의종의 제사를 지냈다. 만동묘는 숭명배청(崇明排淸)을 상징하는 노론의 성지가 됐다. 노론이 권력을 장악하면서 숭명배청은 국가의 지배 이념으로 자리 잡는다. 이 모두 의종 어필이 한 계기가 돼 일어난 일이라고 볼 수 있다.
 
장유승 단국대 동양학연구원 책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