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아이의 감정표현
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오은영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소아청소년클리닉 원장
‘화’라는 감정은 정도에 따라 세분할 수 있다. 예를 들면 ‘불편함→기분 나쁨→짜증→불쾌→화→분노’와 같이 여러 단계를 거치며 상승한다. 임의로 그 단계를 10개 정도로 나눈다고 하면 화를 잘 내는 아이는 1, 2 수준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9, 10 수준으로 화를 폭발시키는 것이다. 화를 전혀 못 내는 아이는 10 수준의 화를 내야 할 상황에 0이나 1 수준으로 표현한다고 볼 수 있다. 보통 소극적이며 내성적인 성격의 아이들이 그런 편이다.
아이의 감정 표현은 기질의 영향을 많이 받지만 부모와의 상호작용으로 그 틀이 완성된다. 부모의 정서 표현과 반응을 그대로 배운다. 따라서 아이가 화를 잘 내는 편이라면, 가장 먼저 부모 자신이 화를 쉽게 내는지부터 돌아봐야 한다. 그런데 부모의 감정 표현이 지나치게 무심해도 아이가 쉽게 화부터 낼 수 있다. 부모가 자신의 말에 반응을 보이지 않으면 아이는 일부러 강도를 높여 부모의 관심을 끌려고 한다. 화를 내서 부모의 관심을 끄는 데 성공했다면 그 이후부터는 습관적으로 화를 내는 강도가 점점 세져서 아주 작은 일에도 걸핏하면 화를 내게 되기도 한다.
아이가 화를 전혀 못 내는 편이라면 부모로부터 감정을 거부당한 경험이 많은 것은 아닌지 살펴봐야 한다. 어렸을 적부터 아이가 재미있다고 호기심을 보이는 일에 “안 돼. 옷 더러워져. 세균 있어” 하면서 뭐든 못하게 했거나 조금만 칭얼대도 “왜 이래? 너 아기 아니잖아!” 식으로 아이의 힘든 감정을 매번 수용해주지 않은 것은 아닌지 생각해본다.
아이가 부정적인 감정을 표현했을 때 무조건 혼을 내도 그럴 수 있다. 아이는 그 자체를 나쁜 행동으로 생각하고 죄책감을 갖는다. 또한 더 이상 혼나기도 싫어서 감정을 자꾸 숨기게 된다. 그러다 보면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표현하는 것을 어려워하는 아이로 자란다. 부부간에 다툼이 심할 때도 그럴 수 있다. 부모가 극도로 긴장된 상태에서 서로 상처를 주는 말을 주고받으면서 점차 상황이 악화되는 광경을 보았기 때문에 아이는 감정을 표현하는 것에 부정적인 생각을 갖게 되기도 한다. 이런 상황에서 일부 아이는 반대로 공격적인 성향을 보인다.
두 아이 모두 화라는 감정을 적당하게 느끼고 적절하게 표현하는 연습을 꾸준히 시켜야 한다. 이때 ‘감정 엘리베이터 게임’이 효과적이다. 화가 난 정도를 건물 10층에 비유하여 자신이 얼마나 화가 났는지 측정하고, 화가 난 수준에 맞게 감정 엘리베이터를 상승시키거나 하강시키면서 감정을 조절하는 방법이다. 화를 잘 내는 아이라면 화난 상태임을 인정하는 것이 첫 출발이다. “화가 많이 났구나. 네가 화난 건 알겠어”라는 말에 이어 “이 상황은 기분이 나빴을 거야. 그런데 화가 났다고 매번 격하게 화를 내는 행동은 문제야” 하고 감정의 실체를 알려준다. 그것만으로도 어느 정도 흥분은 가라앉는다.
그 다음에 감정 엘리베이터 게임을 한다. 미리 아이와 화가 난 정도를 1에서 10까지 정하고 아이가 어느 수준의 화를 내는지 체크한다. 1층은 짜증, 10층은 극도로 분노한 상태를 나타낸다. 아이에게 눈을 감게 한 다음 “지금 10층에서 감정 엘리베이터를 탔어. 이제 서서히 내려갈 거야.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한 층씩 내려오자. 9층, 8층…, 2층, 1층”. 1층에 도착할 즈음에는 아이의 화도 많이 진정된다.
오은영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소아청소년클리닉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