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로는 연필과 종이만 있어도 위로가 되는 순간이 있습니다. 좁은 방에 오래 있을 때나 기분이 가라앉을 때, 혹은 가슴을 뒤흔드는 문장을 만난 책을 덮고 났을 때. 며칠 전에 ‘무서운 슬픔’이라는 시를 읽다가 허리를 곧추세웠습니다. “뱀은 모르겠지, 앉아서 쉬는 기분/누워서 자는 기분/풀썩, 바닥에 주저앉는 때와 팔다리가 사라진 듯 쓰러져 바닥을 뒹구는 때”. 시는 이렇게 끝납니다. “뱀이 지나가듯, 순식간에 그 집 불이 꺼지는 이유”. 갑자기 누가 불을 끈 듯 사위가 고요해졌습니다. 시에서 느낀 무서운 슬픔, 무서운 아름다움이 스쳐 지나간 것일지도요.
무엇에 가슴이 뛰는지, 평생 나를 사로잡는 것은 무엇인지, 하는 질문을 주거나 받을 때가 있습니다. 어떤 이에게는 문학이, 시가 그렇기도 하겠지요. 한때는 저도 시를 쓰고 싶었습니다. 새 시집을 손에 들 때면 여전히 가슴이 두근거립니다. 오래전 대학에서 시를 배울 때 스승은 시는 언어의 정수(精髓)라고 말하였습니다. 언어의 정수. 그것은 얼음처럼 깨끗할 것이며 군더더기 없고 나와 타인을 껴안는, 정신을 일깨우는 힘을 가졌을 거라고 여겼습니다. 흠모하는 마음으로 지금도 매일 시집을 읽습니다.
종이로 만들 수 있는 가장 얇은 책이지만, 파블로 네루다 시집 제목처럼 ‘충만한 힘’을 가진 시집 이야기로 연재를 마칩니다. 정현종 시인의 ‘인사’라는 시가 있습니다. “모든 인사는 시이다. 그것이 반갑고 정답고 맑은 것이라면.” 독자들께 정답고 맑은 인사를 보냅니다. <끝>
조경란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