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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잡史]맹인 점술가 ‘판수’

입력 | 2017-08-21 03:00:00


“맹인은 사농공상에 끼지 못해 생계를 꾸릴 방법이 없으나, 주역을 배워 점을 치고 겸해서 경문을 외워 살아간다. … 저잣거리를 다니며 노래하듯 ‘문수(問數·운수 물어보오)’라 외친다.”(이규경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서)

별다른 직업이 없던 ‘심청전’ 속 심학규와 달리, 조선시대 맹인은 전문직에 종사했다. 조정은 맹인에게 악공과 점술가를 장려했다. 청각·촉각이 뛰어난 맹인은 관현맹(管絃盲)이 되었다. 관현맹은 나라에 소속된 전문 악공이다. 유명한 관현맹으로 세종 때 이반, 성종 때 정범, 김복산 등이 있다.

점술에 뛰어난 맹인은 관상감(觀象監·천문 지리를 담당한 기관) 소속 관원인 명과맹(命課盲)으로 선발했다. 선발되지 못한 맹인은 ‘판수’로 생업을 삼았다. 판수는 민가에서 활동한 독경(讀經)과 점술 전문가였다.

판수는 초하루와 보름이면 명통시(明通寺·맹인 교육 및 집회소)에 모였다. 명통시에서 독경 기술을 전수했고, 정기적으로 나라의 안녕을 비는 제사를 지냈다.

나라에서 거행하는 전례를 정리한 ‘태상제안’에 판수를 동원한 의례가 나온다. 판수는 기우제나 임금이 거처를 옮길 때 동원됐다. 동원된 판수는 ‘옥추경’이라는 도교 경전을 외웠다. 이로써 비를 불렀고 임금이 거처할 곳에 있을지 모를 사악한 기운을 물리쳤다. 중국에서 도교 도사가 하던 일을 조선에서 판수가 담당했던 셈이다.

판수는 무당처럼 현란한 몸짓을 선보이지는 못했다. 그 대신 듣는 이가 혀를 내두를 만큼 빠른 속도로 경전을 한 글자도 틀리지 않고 정확히 외웠다.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해야 하는 일이었다.

19세기 중반까지 살았던 시인 조수삼은 ‘추재기이’에 판수 유운태의 삶을 정리했다. 유운태는 100번 점을 쳐 단 한 번도 실수가 없던 당대 최고 판수였다. 점 풀이로 하는 말도 범상한 판수와는 달랐다. 운수를 묻는 이에게 효의, 공손, 충성, 신의를 말해 사람 된 도리를 일깨웠다. 조선후기 문신 성대중은 유운태를 만나 운수를 물었던 일을 ‘청성잡기’에 쓰면서 “죽을죄를 저지른 죄인이라도 처벌할라치면 유운태의 말이 떠올랐다”고 했다.

조선시대에도 맹인의 삶은 지금처럼 고단했지만 비장애인이 맹인을 보는 시선은 달랐다. 조선 사람은 비장애인이 보지 못하는 것, 느끼지 못하는 것을 맹인이 보고 느낀다고 여겼다. 이러한 믿음 아래 관현맹의 연주에 감탄했고, 판수의 목소리를 신뢰했다.

홍현성 한국학중앙연구원 전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