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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규인의 잡학사전]고시엔, 씨 없는 수박, 박지성까지 다 연결된다?

입력 | 2017-08-21 13:44:00


2009년 ‘고시엔’ 결승전이 진행 중인 한신 고시엔 구장. 동아일보DB


 요즘 일본은 전국 고등학교 야구 선수권 대회 열기로 뜨겁습니다. 이 대회 개최 장소는 그 유명한 한신고시엔(阪神甲子園)구장. 이곳 이름을 따서 이 대회를 그냥 ‘고시엔’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구장 명칭에 들어 있는 것처럼 효고(兵庫) 현 니시노미야(西宮) 시에 있는 이 구장은 원래 일본 프로야구 한신이 안방으로 쓰는 곳입니다. 고시엔 기간에는 이 구장에서 경기를 치를 수 없기 때문에 예전에 한신은 이 대회가 열리는 약 20일 동안 모든 일정을 방문 경기로 소화해야 했습니다.

3주 동안 방문 경기만 치르면 성적에도 악영향을 주는 게 당연한 일. 열성적이기로 유명한 한신 팬들은 이 방문 연전을 ‘죽음의 원정(死のロード)’이라고 부르며 제도 개선을 요구하기도 했죠. 그래서 차로 30분 정도 걸리는 오사카에 돔구장이 문을 연 1997년 이후에 한신은 고시엔 기간 이 돔구장을 임시 안방으로 쓰게 됐습니다.

1997년부터 고시엔 대회 동안 한신이 킨데쓰(~2004), 오릭스(2005~)와 안방으로 나눠 쓰고 있는 교세라돔 오사카. 아사히신문 제공



원래 오사카돔이라고 부르던 이 구장은 교세라(京セラ) 그룹과 명명권 계약을 맺으면서 2006년 7월 1일부터 ‘교세라돔 오사카’로 이름을 바꿨습니다. 야구팬들에게 교세라는 이 구장 이름으로 유명하지만, 주부들에게는 가볍고 강한 세라믹 칼(사진)로 유명한 회사입니다.

일본 세라믹 칼의 자존심이라고 불리는 교세라 칼. 동아일보DB



교세라는 1959년 ‘교토 세라믹(京都セラミツク)’이라는 이름으로 문을 열었습니다. 자세히 보시면 현재 사명도 이 이름을 줄인 형태입니다. 이 회사를 세운 건 이나모리 가즈오(稻盛和夫) 명예회장(85). 그는 ‘회생 불능’ 판정을 받은 일본항공(JAL)을 살려낸 인물로도 유명합니다.

교세라 창업주인 이나모리 회장은 일본 역사상 최대 파산 위기에 몰렸던 JAL의 구원투수로 투입돼 1년 만에 흑자, 2년 만에 역대 최대 흑자 기록을 쓰면서 ‘경영의 신’이라는 별명이 괜히 따라다니는 게 아님을 증명했습니다. 동아일보DB



이나모리 회장의 아내는 아사코(朝子) 여사. 아사코 여사 아버지는 ‘씨 없는 수박’으로 유명한 우장춘 박사(1898~1959)입니다. 그러니까 우 박사가 이나모리 회장의 장인이 되는 셈입니다. 이나모리 회장은 한국 언론과 인터뷰하면서 “경기 수원 시에 있던 장인어른 실험장에 두 번 정도 방문한 적이 있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흔히 생각하는 것과 달리 우 박사는 씨 없는 수박을 처음 만든 사람이 아닙니다. 1950년 우 박사가 귀국했을 때까지도 한국에서는 육종학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습니다. 이에 우 박사는 씨 없는 수박을 만드는 ‘기적’을 통해 농업 기술 중요성을 홍보하려 했던 겁니다.

우 박사는 1935년 ‘종(種)의 합성’ 이론을 다룬 논문으로 일본 도쿄(東京)대에서 농학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이 이론은 진화론의 새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았으며 결국 찰스 다윈(1809~82)이 쓴 ‘종의 기원’ 내용 일부를 수정하게 하기까지 했습니다. 물론 씨 없는 수박 역시 이 이론을 토대로 일본인 교수가 처음 만든 겁니다.

우장춘 박사



세계적인 농학자 우장춘 박사. 그는 자식들에게 양부(養父)를 따라 ‘스나가(須永)’라는 성(姓)을 붙여줬지만, 본인은 계속 우(禹)씨 성을 고집했습니다. 영어 논문에 이름을 쓸 때도 이름 장춘(長春)은 일본식으로 나가하루(Nagaharu)라고 했지만, 성은 우(U)로 적었습니다.

우 박사가 이론적으로만 뛰어났던 것도 아닙니다. 그가 없었으면 우리가 먹는 김치도 지금과 전혀 다른 모양이었을지 모릅니다. 현재 우리가 먹는 배추는 우 박사가 만든 원예 1, 2호를 기초로 개량한 품종이고, 깍두기를 담글 때 쓰는 무도 마찬가지입니다. 또 제주도에 감귤과 유채꽃 재배를 권한 것 역시 우 박사였습니다. 강원도에 감자가 흔해 짓궂은 누리꾼들이 ‘감자국(國)’이라고 놀릴 정도가 된 것도, 가을이면 ‘코스모스 한들한들 피어 있는 길’을 떠올리는 것도 모두 우 박사 업적이죠.


1959년 우 박사가 십이지장궤양으로 병상에 눕자 정부는 문화포장을 수여했습니다. 우 박사는 훈장을 어루만지면서 “고맙습니다. 아버지 나라가 나를 알아줘서…”라고 감격해 했다고 합니다. 그러고 나서 “조금만 더 일찍 알아주지…”라며 서글프게 눈물을 흘렸다고 하네요.

우 박사의 아버지는 우범선 씨(1857~1903). 그는 명성황후시해사건(1895년)에 앞장섰던 사람입니다. 우 박사는 일본으로 망명한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이런 출생 배경은 지금도 누군가 문제 삼을 소지가 다분한 게 사실. 해방 후 얼마 지나지 않은 당시에는 더했습니다. 우 박사는 훈장을 받고 나서 사흘 뒤에 숨졌고, 수원 농촌진흥청에 묻혔죠.

우 박사 가문과 수원의 인연은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이나모리 회장은 나중에 수원을 대표하는 인물과 인연을 한 번 더 맺기도 했습니다. 주인공은 축구 선수 박지성(36). 그가 일본 프로축구 J리그에서 뛸 때 소속팀이었던 교토 퍼플 상가(현 교토 상가 FC)의 후원 기업 중 하나가 교세라입니다. (참고로 상가·サンガ는 산스크리트어에서 온 말로 ‘동료’라는 뜻입니다. 가게를 뜻하는 상가·商家하고는 관련이 없습니다.)

교토 퍼플 상가 입단식에서 앞가슴에 ‘교세라(京セラ)’라고 쓴 유니폼을 들고 있는 박지성(가운데). 동아일보DB



2002년 한일 월드컵 이후 박지성이 네덜란드 리그에 진출하려 하자 이나모리 회장은 직접 박지성을 만나 잔류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가 네덜란드 에인트호번 행을 결정하자 이나모리 회장은 박지성과 다시 만나 “박 군, 언제든 돌아온다면 환영하겠다”고 말하며 아쉬워했습니다.

어떻습니까. 세상만사는 어쩌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얼기설기 엮여 있는지도 모릅니다.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그 어떠하리….


황규인 기자 kin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