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성철 사회부 차장
L은 이명박 정부 시절 국정원 안팎에서 꽤 유명한 실세였다. 이명박 전 대통령과 원세훈 전 국정원장이 각각 서울시장과 부시장일 때, 국정원 조정관으로 서울시를 출입한 덕분이었다. L은 당선자 인수위원회 인사검증팀과 대통령민정수석실에서 파견 근무를 한 뒤 2009년 초 국정원장 비서실로 화려하게 컴백했다.
L이 파면을 당한 건 바로 그 무렵 벌인 일들 때문이다. 사건 기록에 따르면 2009년 초 L은 인사 담당자에게 영향력을 행사해 자신과 함께 근무한 인연이 있는 부하 직원들을 감찰실에 심었다. L의 도움으로 감찰실에 들어간 이들은 각종 내부 동향을 파악해 직속 상사 대신 L에게 보고했다. 또 L과 갈등 관계이던 일부 직원에 대해서는 미행 등 뒷조사도 서슴지 않았다.
요즘 국정원 내부는 L이 파면당할 때와 여러모로 닮았다. 지난해 국정 농단 사건이 불거진 후 실세로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한 추명호 전 국장은 L처럼 박근혜 정부가 출범할 때 인수위에 파견을 다녀온 경력이 있다. 추 전 국장이 L보다 직급이 높다는 점만 다를 뿐, 정권 실세와의 친분을 배경으로 전횡을 저지른 스토리도 상당 부분 L의 그것과 닮았다. 감찰실이 선봉에 서서 전 정권 ‘부역자’들을 손보는 상황은 아예 데칼코마니다.
달라진 점은 국정원의 감찰 상황이 매우 신속하게 외부에 중계되고 있다는 정도다. 4년 전 L이 파면됐을 때는, 국정원은 언론 보도 이후에도 정보기관답게 “확인해줄 수 있는 내용이 없다”는 자세였다. 반면 최근 추 전 국장 등에 대한 감찰은 국정원 개혁발전위원회를 통해 실시간으로 언론에 전파되고 있다. 정보기관의 내부 비위가 감찰이 끝나기도 전에 이렇게 외부에 공표돼도 괜찮나 싶을 정도다.
L이 파면을 당한 4년 전 일이나, 국정원 내부의 최근 상황을 ‘보복 감찰’이라고 잘라 말하기는 어렵다. L이나 추 전 국장은 분명히 어느 정도 잘못을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매번 정권이 바뀐 이후에야 국정원 감찰실이 끈 떨어진 실세의 비위를 들추며 뒷북을 치는 모습은 보기 흉하다. 그들은 L이나 추 전 국장이 기세등등할 때, 그리고 국정원 심리정보전단이 문제의 ‘댓글 작업’을 할 때 나섰어야 했다. 감찰실이 힘 있는 간부들의 불법과 일탈에 눈을 감는 버릇을 고치지 않는 한, 국정원은 영원히 개혁 대상일 수밖에 없다.
전성철 사회부 차장 daw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