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오늘(8월 23일)은 ‘야구의 날’입니다.
야구 팬 중에는 한국 국가대표팀이 베이징(北京)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낸 게 2008년 8월 23일이라 이날을 야구의 날로 정했다고 알고 계신 분이 많습니다. 얼핏 속기 딱 좋은 얘기입니다.
(참고로 원래는 12월 11일이 비공식 야구의 날이었습니다. 1981년 프로야구 창립총회를 열었던 게 이날이었거든요. 2012년까지 골든글러브 시상식을 이날 열던 건 그런 까닭입니다. 2013년 이후 골든글러브 시상식은 12월 둘째 화요일.)
사연인즉 이렇습니다. 이날 대구구장에서는 안방 팀 삼성이 쌍방울을 불러들여 더블헤더(연속경기)를 치렀습니다. 더블헤더 1차전에서 삼성이 9회초 수비에 들어갔을 때만 해도 4-0으로 앞서고 있었습니다. 9회초에 쌍방울이 1점을 따라붙었지만 2사 1, 2루라 아웃 카운트 하나만 더 잡으면 경기가 끝나는 상황이었습니다.
쌍방울 김성근 감독은 장재중(46)을 대타로 냈습니다. 볼카운트 1볼 2스트라이크에서 삼성 투수 김태한(48)이 던진 공이 낮게 떨어졌고 장재중은 헛스윙 삼진. 이 공을 받은 삼성 포수 김영진(45)은 팬 서비스 차원에서 공을 관중석으로 던졌습니다. 당시 이 경기를 생중계하던 SBS는 종료 자막을 내보냈고 한국야구위원회(KBO) 온라인 경기 상황에서는 투수 승패 기록까지 모두 나온 상태였습니다.
이날 주인공 김영진. 그는 프로야구에서 통산 타율 0.155, 5홈런, 45타점을 남긴 채 2001년 한화를 마지막으로 유니폼을 벗었습니다.
이날 주인공 김영진. 그는 프로야구에서 통산 타율 0.155, 5홈런, 45타점을 남긴 채 2001년 한화를 마지막으로 유니폼을 벗었습니다.
그런데 쌍방울 더그아웃에서 장재중을 향해 ‘1루로 뛰라’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삼성 백인천 감독도 김영진에게 ‘공을 1루로 던지라’고 소리쳤지만, 공은 이미 어디론가 사라진 다음이었습니다. 김동앙 주심은 그대로 경기종료를 선언하려고 했지만 이런 일을 그냥 넘어갈 김 감독이 아니었습니다. 김 감독은 본부석으로 들어가려던 심판진을 구장 안으로 밀치면서 격렬하게 항의했습니다.
쌍방울 시절 김성근 감독
김 주심은 김 감독에게 퇴장 명령을 내린 뒤 4심 합의를 거쳐 오심을 시인했습니다. 뭐가 오심이었을까요? 김태한이 던진 공이 원바운드로 들어왔거든요. 야구 규칙에 익숙한 분들은 잘 아시는 것처럼 이때는 ‘스트라이크 아웃 낫아웃’ 상황이 됩니다. 이때 타자를 아웃시키려면 수비팀은 공을 잡고 타자를 태그하거나 1루로 공을 던져야 합니다.
하지만 삼성은 먹고 죽으려고 해도 공이 없는 상황. 김영진은 “심판이 삼진 콜 하는 걸 듣고 공을 던졌다”고 항변했지만 소용없었습니다. 심판진은 결국 타자 주자를 포함해 각 주자가 두 베이스씩 진루하도록 했습니다. 쌍방울이 2-4로 뒤진 상태에서 주자를 2, 3루에 두고 공격을 계속하게 된 겁니다. 쌍방울 다음 타자 최태원(47)이 2타점 적시타를 때려 4-4 동점이 됐고, 쌍방울은 이후 두 점을 더 뽑으면서 6-4로 경기를 가져가게 됩니다.
이날 해프닝을 전한 1997년 8월 24일자 동아일보 스포츠면.
삼성 쪽에서 생각하면 오심 때문에 어처구니없는 패배를 당한 겁니다. 이렇게 황당한 패배를 당하면 다음 경기에도 영향을 주는 게 보통. 하지만 삼성은 이날 2차전에서는 10-5로 승리하면서 아쉬움을 털어버렸습니다. 물론 2차전에서 삼성은 김영진 대신 양용모(50)에게 포수 마스크를 씌웠습니다.
그러니까 이날 대구 더블헤더에는 △대낮부터 야구장을 찾은 팬에게 승리구를 선물하고 싶은 팬 서비스 정신 △야구 규칙의 복잡한 아름다움 △실수를 인정하는 겸손함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게 아니라는 ‘좌절 금지’ 정신 △패배를 이기는 가장 빠른 길은 승리라는 투쟁심 등이 모두 녹아 있던 겁니다.
재정경제원(현 기획재정부) 장관을 지낸 홍재형 당시 KBO 총재는 이날 상황을 보고 받은 뒤 이런 정신이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에 시달리고 있던 국민에게 용기를 줄 것으로 판단해 이날을 야구의 날로 지정하라고 지시 했습니다 …. 라는 건 물론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이날 이런 일이 있던 건 사실이지만 8월 23일이 야구의 날이 된 건 베이징 올림픽 야구 금메달 때문이 맞습니다.
아, 8월 23일은 프로야구 팬 사이에서 아주 유명한 ‘캡처 사진’이 세상에 나온 날이기도 합니다. 류현진(30·LA 다저스)은 2012년 이날 문학 방문 경기 8회말 수비 때 병살타성 타구를 유도했지만 2루수 실책으로 1사 2, 3루가 되자 아래 사진 같은 표정을 지었습니다.
중계화면 캡처
사실 그렇습니다. 누구나 실수를 하고, 때로는 그 실수가 다른 사람에게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합니다. 그래도 엎질러진 물은 이미 엎질러진 물. 실수를 만회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다시는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는 일일 겁니다. 류현진도 저 고통을 이겨냈기에 메이저리거가 될 수 있었을 겁니다.
그럼 야구팬 여러분 모두, 지난 실수를 반복하지 않는 야구의 날 보내세요.
황규인 기자 kin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