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천 광통교 복원 소식을 알린 동아일보 2005년 8월 24일자 12면.
“조선 시대에 가족의 행운과 건강을 비는 다리 밟기를 하던 곳으로 서울의 명물이던 광통교가 95년 만에 시민의 품으로 돌아왔다.”(동아일보 2005년 8월 24일자)
광통교(廣通橋)는 광통방(廣通坊) 근처 청계천 위에 세워져서 붙여진 이름이다. 조선 시대 도성 내에서 가장 큰 다리였으며, 길이 12m, 폭 15m로 길이보다 폭이 넓은 다리였다. 조선 초 도성을 건설할 때 흙으로 다리를 만들었던 것이, 태종 때인 1410년 폭우로 다리가 유실돼 돌로 다시 만들었다.
1899년 종로-남대문 구간에 전차노선이 신설되면서 광통교 동편에 전차선로가 놓이게 된다. 1910년 이 노선을 복선화하면서 광통교 위로 전차가 통행하게 됐고, 이때 다리 위에 1m 정도의 콘크리트를 쏟아 붓고 선로를 설치하면서 사실상 도로 밑에 묻혔다.
동아일보DB조선 후기 화가 임득명이 그린 ‘가교보월(街橋步月)’. 정월 대보름에 청계천 광통교에서 다리밟기를 하는 서민들의 모습을 그렸다.
현재의 광통교 자리가 원래 있던 곳은 아니다. 원래 자리는 중구 남대문로1가 조흥은행 본점 앞 광교사거다. 하지만 차량의 원활한 교통 흐름을 위해 원래 위치에서 청계천 상류 155m 지점인 중구 한국관광공사 앞에 놓였다.
태종이 광통교를 만들었을 때의 뒷얘기 한 토막. ‘태종의 복수’다. 태종의 계모이자 태조 이성계의 둘째왕비인 신덕왕후는 태조의 극진한 사랑을 받았던 여성이다. 정치적 감각도 뛰어났던 신덕왕후가 자신의 둘째아들 방석을 왕위에 올리려 하면서, 정비의 아들인 이방원과 갈등이 깊어졌다. 방석이 왕세자로 책봉되긴 했으나 신덕왕후가 세상을 떠난 뒤 이방원이 1차 왕자의 난(1398년)을 일으키면서 방석은 살해됐다. 태종은 즉위한 뒤 덕수긍 인근에 있던 신덕왕후의 무덤인 정릉(貞陵)을 성북구 정릉동으로 옮겨 버렸고, 능을 구성하던 석재들은 버려뒀다. 이후 광통교를 돌다리로 바꾸면서 태종은 계모의 묘를 장식했던 돌들을 광통교의 받침돌로 사용했다.
동아일보DB2005년 8월 23일 복원된 광통교. 발굴조사를 통해 확인된 부분과 창덕궁 및 탑골공원에 흩어져 있던 부분을 찾아내 활용해서 예전의 모습으로 복원했다.
2005년 복원 뒤 광통교 석축에 새겨진 불상 10개 중 7개가 거꾸로 된 것이 화제가 되면서 이 사연이 조명되기도 했다. 서울시 청계천복원본부는 “광통교는 문화재청 자문위원회의의 고증을 거쳐서 원형대로 복원했다”며 “불상조각을 제대로 세워보았지만 받침돌 틈이 벌어졌고 뒤집어야 돌들이 제대로 맞춰졌다”고 했다. 태종이 광통교를 만들 때 불상조각을 악의적으로 뒤집었다는 분석이 나온다.(동아일보 2005년 10월 14일자).
김지영 기자 kimj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