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24일 일본 도쿄 롯데 본사에서 열린 롯데홀딩스 주주총회 참석 차량. 고위 인사가 탄 이 고급 승용차의 모든 유리에 전혀 틴팅이 돼 있지 않아 실내가 환하게 들여다보인다. MBC TV 화면 캡처
석동빈 기자
주주총회에서 신격호 총괄회장의 퇴임안 통과 여부가 초미의 관심사였는데, 정작 기자의 눈길을 끈 것은 롯데 인사들이 타고 온 자동차였습니다. 대기업의 최고 경영진이나 대주주들이 탄 자동차임에도 틴팅(선팅)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신동빈 회장이 타고 온 렉서스의 앞 유리를 통해 신 회장의 얼굴과 차 내부가 취재진의 카메라에 그대로 잡혔습니다. 신동주 전 부회장이 타고 온 승합차와 그 외 VIP의 승용차에서도 법규에 어긋나는 틴팅을 찾아보기 힘들었습니다. 사소한 것 같지만 대기업 오너라도 법을 벗어나는 특권을 누리기 쉽지 않은 사회구조가 갖춰졌다는 상징적인 의미입니다.
한국에선 틴팅 규정을 위반하지 않은 자동차를 찾아보기가 힘듭니다. 부끄럽게도 기자의 자동차에도 약한 틴팅이 돼 있습니다. 신동빈 회장도 한국에선 틴팅이 된 메르세데스벤츠를 탑니다. 틴팅이 위법이냐고요? 네 그렇습니다. 과거 자동차관리법에 틴팅 제한 규정이 있어서 자동차 정기검사 때 틴팅 필름이 붙어 있으면 통과할 수가 없었고 경찰이 도로에서 상시 단속을 했습니다.
하지만 규제 완화라는 시대적 미명 아래 1999년 자동차관리법에서 틴팅 관련 항목이 사라지면서 경찰의 단속도 사실상 중단됐습니다. 국회의원과 고위 공무원, 대기업 오너들은 그 이전부터 특권의식 속에 짙은 틴팅을 하고 다녔고, 지금은 단속의 주체인 경찰서장의 승용차는 물론이고 일선 순찰차에도 틴팅이 돼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도로교통법에는 전면 유리의 가시광선 투과율은 70%, 운전석 좌우와 뒤 유리는 40%를 넘어야 한다는 조항이 버젓이 살아 있고 범칙금 2만 원을 부과할 수 있습니다.
참고로 짙은 틴팅이 허용된 부분은 뒷좌석 좌우 유리밖에 없고, 뒤 유리는 올리고 내리는 블라인드 방식만 허용됩니다.
틴팅 규정을 위반하면 미국은 주에 따라 최고 1000달러의 벌금이 부과되며 심지어 일본에서는 틴팅을 해준 업체까지 처벌을 받습니다. 이처럼 선진국들이 틴팅을 엄격하게 규제하는 것은 사생활보다 공공의 안전을 우선시하기 때문입니다. 짙은 틴팅은 운전자 본인은 물론이고 주변 자동차들의 시야를 방해해 사고를 유발하고 운전 중 휴대전화 사용, 난폭운전, 전용차로 위반 등 범법을 부추깁니다. 최근 폭염 속에서 유치원 통학 승합차 안에 갇힌 어린이가 짙은 틴팅 때문에 뒤늦게 발견돼 의식불명에 빠지는 사고가 발생하기도 했습니다.
국가의 경제·사회·문화의 수준은 자동차문화를 보면 쉽게 파악됩니다. 개인의 식별이 가능한 공공장소에서는 모범시민이지만 익명성이 보장되는 운전석에만 앉으면 동물적인 본능을 거침없이 드러내는 운전자들의 비율이 높은지 낮은지에 달려 있습니다. 신호 위반과 새치기 같은 얌체운전은 먼저 먹이를 차지하려는 생존경쟁의 동물적 표현입니다. 고성능 스포츠카로 사람 많은 번화가에서 큰 배기음을 내며 달리는 행동은 다른 수컷보다 돋보이고자 하는 짝짓기 본능에서 나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올해 초 국정 농단 사태를 지켜보며 ‘이게 나라냐’라고 하는 자조 섞인 탄식이 국민들의 입에서 흘러나왔습니다. 그런데 그런 무법(無法)의 국가를 가능하게 한 것 또한 국민 개개인의 총합이 아닐까요. 대통령이나 정치권만 국민들의 평균 수준보다 유독 떨어질 가능성은 낮아 보입니다.
익명성에 숨어서, 남들보다 빨리 가고 싶고, 돋보이고 싶고, 특별대우 받고 싶은 동물적인 욕망이 도로 위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난다면 ‘이게 국민이냐’라는 말이 나오지 말라는 법도 없습니다. 광장에 모여서 역사의 큰 흐름을 바꾸었듯이 자동차문화의 개선으로 ‘이게 국민이다’는 것을 보여 줄 때가 된 것 같습니다.
석동빈 기자 mobidic@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