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6년 베를린올림픽 남자 마라톤 정상에 오른 손기정의 사진은 동아일보 이길용 기자에 의해 일장기가 지워진 채 보도됐다. 이길용 기자를 기리기 위한 흉상 제막식이 서울 중구 손기정 기념관에서 25일 열린다. 동아일보DB
동아일보 이길용 기자, ‘손기정 일장기 말소’ 주역
독립정신 기려 25일 손기정기념관서 흉상 제막식
1936년 8월9일 밤 11시2분. 서울은 비가 내리고 있었다. 하지만 광화문 동아일보사(현 일민미술관) 앞에는 많은 시민들이 우산을 쓰고 몰려있었다. 동아일보사의 스피커를 통해 광화문 네거리에 울려 퍼지는 베를린올림픽 남자마라톤 NHK의 라디오(JODK) 중계방송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던 것이다.
동아일보사 귀빈실에는 내로라하는 체육계 인사들이 둘러앉아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중계방송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양정고보 교장 안종원, 교무주임 서봉훈, 고려육상경기협회 이사 최재환, YMCA 체육부주임 정권, 1932년 LA올림픽 마라톤 6위 입상자 김은배 등이 그들이었다.
동아일보사 앞에서 진을 치고 라디오 중계방송을 듣고 있던 시민들은 하나둘 집으로 가거나 인근 청진동 대폿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동아일보사에 초청된 인사들도 입맛을 다셨지만 별수 없었다. 그들은 4년 전 LA올림픽에 출전했던 김은배의 이야기를 들으며 속속 편집국에서 넘어오는 베를린 소식을 접하며 마른침을 삼켰다.
이길용 기자
● 이길용 기자는 왜 일장기를 지웠는가
그 시각 동아일보사 편집국은 기자들이 피워댄 담배연기로 자욱했다. 운동부(체육부) 기자들은 전화통을 붙잡고 도쿄와 베를린에 선을 대기위해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대기 시작했다. 그 중에서도 베를린올림픽 취재 반장격인 이길용 체육주임기자(1899~?)가 가장 바빴다. 이 기자는 조선체육계의 마당발이었다. 키는 작달막하고 체구는 호리호리했지만 눈은 광채로 번득였다. 그는 이미 손기정이 우승할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그렇다면 우선 내일 아침 당장 호외부터 만들어야 할 것이었다. 당시 동아일보는 석간이었다.
이길용 기자는 사회부 편집 담당 장용서 기자를 불렀다. “윤치호(1865~1945) 조선체육회장 댁에 간 친구들은 어떻게 된 거야. 틀림없이 손기정이 우승할 테니 윤 회장 소감을 받아오라고 했는데…” 윤치호는 1928년 이래 8년 동안 조선체육회장직을 맡고 있었다. 그 당시 그는 병으로 자리에 누워있어서 동아일보사로부터 초청을 받았지만 움직일 수가 없었다.
“저희 바깥양반은 몸집이 작아 몸무게는 45.46kg 밖에 나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몸은 남달리 튼튼해서 그 때까지 병 한번 걸린 일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분도 종로서의 고문으로 완전히 몸이 상해버렸습니다. 유치는 40일 동안 계속됐고 그 사이 면회는 한번도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저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물품을 들여보내는 차입뿐 이었죠. 그리고 차입하면 그것과 교체해서 입었던 옷을 받아낼 수 있었습니다. 여름이었으니까 속옷과 와이셔츠를 여러 차례 들여보냈죠. 그러면 나오는 와이셔츠는 언제나 피투성이였습니다.” -<이길용의 부인 정희선의 회고>
한편 배편으로 귀국 중이었던 손기정은 싱가포르에서 이 사건의 전말을 교민으로부터 처음으로 전해 들었다. 손기정은 비통한 심정으로 울먹이며 말했다.
“나의 심경을 대변해 준 동아일보에 감사한다. 고초를 겪고 있는 기자들을 생각하니 가슴이 아프다”
해방 후 동아일보에 복직한 이길용 기자는 “운동기자 생활 16년! 이처럼 흥분되고 기꺼운 때가 또 언제 있었으랴. 나는 이 나라의 아들인 손 선수를 왜놈에게 빼앗기는 것 같은 느낌이, 그 유니폼 일장마크에서 엄숙하게도 충격을 받았다. 동아지(東亞紙)의 일장기 말살이란 항다반(恒茶飯)으로 부지기수다. 사내의 사시(社是)라고 할까, 전통이라고 할까, 방침이 일장기를 되도록은 아니 실었다. 우리는 도무지 실지 않을 속셈이었던 것이다”라고 회고했다.
이길용은 1899년 경남 마산에서 출생하여 인천에서 성장했다. 인천에서 영화학교를 다녔고 이후 서울의 배재학당을 졸업했다. 일본의 도시샤(同志社)대학에서 공부했지만 집안 사정으로 중도 포기하고 귀국했다. 1919년 남만주철도주식회사 경성관리국에 근무하며 상해 임시정부의 반일격문을 수송하다가 일본경찰에 잡혀 첫 번째 옥고를 치렀다. 이후 1921년 동아일보에 입사하여 1923년부터 전조선여자정구대회를 주관 운영하는 일에 앞장섰다. 1927년 조선운동기자단을 결성했고 광복이후 일제에 의해 사라진 대한체육회의 전신 조선체육회를 재건했다. 이길용은 창씨개명을 거부하여 세 번째로 투옥되었다가 1945년 광복 며칠 전 형기를 마치고 출소했다. 1950년 6.25 전쟁 때 납북되었고 이후의 행방은 알 수 없다.
베를린 올림픽 당시 손기정. 사진=ⓒGettyimages이매진스
● “손기정 만세, 남승룡 만세, 조선 만세!”
역사의 시계는 다시 1936년 8월10일 새벽 2시. 광화문 동아일보사 앞에는 다시 많은 시민들이 우산을 쓰고 몰려왔다. 앞서 중계방송이 끊긴 손기정의 베를린 마라톤 소식이 궁금했던 것이다. 장맛비는 그해 7월부터 줄기차게 내렸다(8월14일까지 조선 전국 사상자가 총265명, 이재민이 무려 6만여 명에 이를 정도였다. 8월14일부터는 낙동강이 범람하여 삼랑진 구포 양산 김해 일대가 물바다가 됐다).
이윽고 동아일보사 사옥 2층 창문에 한 여자가 나타났다. 그리고 그녀는 “손기정 군이 2시간29분12초 올림픽 최고기록으로 우승을 차지했고 남승룡 군도 3위로 들어왔습니다”라고 말했다. 시민들은 그 순간 “와” 함성을 질렀다. 여기저기서 “손기정 만세, 남승룡 만세” 소리가 터지기 시작했다. 그러다 누군가 “조선만세”를 외쳤다. 그러자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만약 일본순사가 들었다면 큰일 날 소리였던 것이다. 하지만 금세 “손기정 만세”가 폭죽처럼 터지며 그 어색한 순간은 ‘소리의 바다’에 묻혀버렸다. 모두들 우산도 내던져 버렸다. 누가 시킬 것도 없이 모두들 거리로 쏟아져 나가 “손기정 군이 베를린 올림픽마라손에서 우승했다”고 소리쳤다. 이들은 날이 새도록 서울 장안 곳곳을 누비며 목이 터져라 “손기정 우승”을 외치고 다녔다. 한마디로 그것은 기미년 독립만세 소리와 버금가는 ‘기쁨의 눈물바다’였다.
김화성 스포츠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