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세상 뜰 때
우선 두 손과 두 발, 그리고 입을
가지고 가리.
어둑해진 눈도 소중히 거풀 덮어
지니고 가리.
허나 가을의 어깨를 부축하고
때늦게 오는 저 밤비 소리에
기울이고 있는 귀는 두고 가리.
소리만 듣고도 비 맞는 가을 나무의
이름을 알아맞히는
귀 그냥 두고 가리.
올해 가을은 더딘가 보다. 우리는 어느 때보다 가을에 목마르다. 끈질긴 더위도 더위지만, 자연의 섭리라도 좀 자연스럽게 흘러가주면 사는 게 덜 퍽퍽하겠다.
벌써 마음만은 가을인 분들이 가을 대비 시집 한 권 읽겠다면 황동규의 ‘풍장’을 권하고 싶다. 비울 것 비우고, 채울 것 채우기에 좋은 시집이다. ‘풍장’이라고 하면 대개 하나의 시를 떠올리지만, ‘내 세상 뜨면 풍장시켜 다오’로 시작하는 그 시는 ‘풍장’의 1편이다. 그것 말고도 ‘풍장’은 69편이 더 있다. 그중에서도 나는 27번째 ‘풍장’을 가장 좋아한다. 가을을 기다리는 사람에게 딱 어울리는 작품이기도 하다.
이 시의 주제는 ‘죽은 나’이다. 말투는 참 차분한데, 곰곰이 생각해 보면 주제가 섬뜩하다. 죽음은 알 수 없고 두렵기 때문에 우리는 죽음 이야기를 금기시하는 경향이 있다. 자신의 죽음이란 더욱 말하기 어려운 주제다. 그런데 이 시인은 죽음에 대해 매우 구체적인 계획을 갖고 있다. 심지어 죽은 자신을 상상하면서 조목조목 희망사항을 나열하기도 한다. 이 점이 신선하면서도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만든다.
나민애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