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플린과 히틀러의 세계대전/오노 히로유키 지음·양지연 옮김/352쪽·1만6800원·사계절
채플린이 히틀러를 겨냥해 만든 영화 ‘위대한 독재자’의 한 장면. 채플린은 “독재자들로 뒤엉킨 작금의 정치 상황, 과도한 위엄과 권력을 쥔 자는 당연히 희극의 대상이며 표적이다. 이 영화는 아직 유머 감각이 허용된 국가에서 개봉될 것”이라고 말했다. 사계절 제공
51년 뒤 6월 23일 나치 독일의 총통 히틀러는 프랑스 파리에 점령자로 입성했다. 하루 뒤 채플린은 미국 할리우드에서 영화 ‘위대한 독재자’ 라스트신 촬영을 시작했다.
6분에 이르는 독재자의 연설 장면. 온 세계 영화 팬의 사랑을 받은 남자가, 온 세계를 증오의 광기로 몰아넣은 동갑내기 남자의 말투를 흉내 내며 속사포 대사를 쏟아낸다. 채플린이 자신의 육성을 필름에 담은 건 이 영화가 처음이었다.
채플린 연구로 명망 높은 극작가인 일본인 저자는 “채플린과 히틀러는 각자의 사상을 짊어지고 ‘미디어’ 전쟁터에서 사투를 벌였다”고 썼다. 책은 ‘위대한 독재자’라는 클라이맥스에 이르기까지 이 두 닮은꼴 콧수염 사내들이 주고받은 ‘이미지 전쟁’의 기록을 엮었다.
1940년 10월 16일 뉴욕타임스 ‘위대한 독재자’ 특집기사에 실린 채플린(왼쪽)과 히틀러의 사진.
히틀러는 어떤 대상에 대한 집단적 적개심을 부추겨 군중을 흥분 상태에 가둬두는 재주에 특출했다. 그는 교묘하게 연출한 집회 연설을 통해 군중의 기대를 신앙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중요한 건 연설 내용이 아닌 형식이었다. 히틀러의 참모 괴벨스는 연설 영상을 독일의 모든 극장에서 영화 시작 전 반드시 상영하도록 했다.
채플린은 파시즘의 본질이 언어의 구체성을 흡수해 버리는 ‘리듬’에 있음을 피력했다. 말의 의미를 말소한 리듬이 개인의 의지를 제거해 순종적 인간을 양산한다는 것. 채플린은 비극의 책임 소재를 모호하게 만드는 이 리듬이야말로 시대의 공포임을 간파했다.
영화라는 미디어를 통치 시스템의 주요 도구로 삼은 나치는 그런 채플린을 철저히 배제하고 공격했다. 부계와 모계 4대가 모두 영국인인 채플린을 ‘유대인 광대’라 몰아세운 나치의 눈에 특히 거슬린 건 이 평화주의자 월드스타의 콧수염이었다. 프랑스 평론가 앙드레 바쟁은 “무의식적 사회 영향력의 결과로 히틀러가 채플린의 콧수염을 따라했다”고 주장했다.
“저 사람은 배우야. 내가 여태껏 본 사람 중 가장 뛰어난 배우.”
1937년 스토리 구상에 착수한 ‘위대한 독재자’는 당시 나치와 우호적 관계를 유지했던 영국과 미국 정부로부터 누차 제재 경고를 받았다. 2년 뒤 전쟁 발발 직후에는 전쟁의 비인간성을 비판한다는 내용이 알려지며 더 큰 제작 중단 압박에 시달렸다. 전쟁의 한복판에서 힘겹게 빚어낸 이 반전(反戰) 영화에 대해 채플린은 이렇게 말했다.
“웃음은 광기에 대항하는 방패다. 모든 영화는 프로파간다다. 로맨스 영화는 사랑의 프로파간다, 갱스터 영화는 법을 어기면 벌을 받는다는 프로파간다, ‘위대한 독재자’는 민주주의의 프로파간다다.”
‘위대한 독재자’의 세계적 흥행 이후 히틀러는 공공장소 연설을 현저히 줄였다. 카메라를 뚫어져라 직시하는 라스트신을 보면 알 수 있다. 이미지를 무기로 세계인의 광기를 부추긴 히틀러로부터 채플린이 무엇을 탈환했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