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커버스토리]작년 대부업 금리인하 이후 사채로 내몰린 저신용자들
23일 서울 중구 한국대부금융협회 소비자보호센터에서 사채업자에게 피해를 당한 남성(왼쪽)이 상담을 받고 있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불법사채 피해 신고 건수는 지난해 2306건으로 집계됐다. 장승윤 기자 tomato99@donga.com
보험설계사 어모 씨(36)는 2009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부터 가계가 기울었다. 경제 한파로 보험 해지가 줄을 잇자 실적에 따라 수당을 받던 그의 월급은 230만 원에서 40만 원으로 곤두박질쳤다. 그렇다고 일을 완전히 손에서 놓을 수 없어 매일 고객 확보를 위해 서울 구석구석을 돌아다녔다. 하지만 지출은 좀처럼 줄지 않았고 2010년엔 쓰는 돈이 버는 돈보다 많아지며 카드 빚이 생겼다. 은행에선 카드 연체 기록이 있는 그에게 돈을 빌려주지 않았다. 그는 대부업체에서 300만 원을 빌려 생활비로 썼다.
올해 다시 생활이 어려워진 그는 대부업체의 문을 두드렸지만 “대출이 불가능하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지난해 3월 법으로 정해진 최고 대출금리가 34.9%(연리 기준)에서 27.9%로 낮아지며 대부업체가 리스크 관리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대부업체는 27.9% 금리에 어 씨에게 돈을 빌려주느니 차라리 대출을 거절하는 쪽을 택했다. 그는 결국 사채시장으로 몰렸다.
보험설계사 어 씨가 올 3월 대부업체에서 빌리려 한 돈은 50만 원이었다. 카드 연체와 대부업체 이용 경력 등으로 신용카드 발급은 꿈도 못 꿨다. 설계사 일이 마음대로 되지 않자 그에게는 적은 액수의 현금마저 하루가 아쉬웠다.
“2010년에 한 번 써봤던 A업체에 50만 원을 빌릴 수 있는지 문의했어요. 소액이니까 아무리 신용등급이 낮다 해도 돈을 빌려줄 것이라 생각했어요. 그런데 대출이 안 되더라고요. 절망적이었죠.”
그는 인터넷을 뒤적였다. ‘대부업체’ ‘급전’ 등의 키워드로 검색하니 대부업체 목록이 주르륵 떴다. 그중 한 곳에 전화를 했다. 선뜻 50만 원을 빌려주겠다는 답이 돌아왔다. 자신을 ‘대부업체 사장’이라고 소개한 남자는 직접 만나 돈을 주겠다고 했다.
서울의 한 커피숍에서 ‘대부업체 사장’을 만났다. 알고 보니 그는 미등록 대부업, 즉 사채업을 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어 씨에게 50만 원을 빌려주는 대신 선이자로 20만 원을 떼겠다고 말했다. 일주일 뒤 갚아야 할 원금은 50만 원. 사실상 30만 원을 빌려주고 이자로 20만 원을 받는 식이었다. 일주일 이자만 40%, 연간으로는 2000%가 넘는 살인적인 금리였다. 하지만 당장 돈이 필요했던 어 씨는 이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어 씨는 “특별히 사연 있는 사람이나 사채를 쓰는 줄 알았다”며 “정말 돈이 급하니까 앞뒤 안 가리고 돈을 구하게 되더라”고 털어놓았다.
살인적인 금리로 내몰리는 저신용자들
법정 최고금리의 인하는 문재인 정부의 공약 사항이다. 고금리 대출로 인한 서민들의 피해를 줄이고 가계의 실질소득을 늘리겠다는 의도다. 가뜩이나 이미지가 좋지 않은 대부업체들을 손보겠다는 뜻도 담겨 있다. 일부 시민단체는 최고금리를 20% 수준까지 낮춰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숫자만 바꾼다고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라고 지적한다. 공약 사항을 실천해야 하는 금융당국에서도 법정금리를 무작정 인하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라며 우려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이런 우려들은 실제로 일부 현실화되고 있다. 한국대부금융협회가 7월 대부업체 35곳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최고금리를 25%로 낮출 경우 신규 대출이 27.5% 줄어들 것으로 추산됐다. 대출자 수로 따지면 약 34만 명이 등록 대부업체의 심사 문턱에서 탈락한다는 뜻이다. 금융위원회가 최근 발표한 ‘2016년 하반기 대부업 실태조사’에서도 최고금리가 인하된 지난 한 해 동안 대부업 이용자가 17만9000명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
가장 큰 피해를 보는 건 가장 신용도가 낮은 7∼10등급 저신용자다. 대부협회가 상위 75개 업체를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저신용자로 분류되는 7∼10등급의 대부업 이용자 수는 지난해 8.3% 줄고, 4∼6등급은 5.8% 늘었다. ‘떼이는 돈’을 줄여야 수익성이 유지되는 대부업체들이 리스크가 상대적으로 적은 중(中)신용자로 대출 영업의 주 타깃을 바꾼 것이다.
폭력적인 추심에 무방비로 노출
최고금리가 낮아질 때 나타나는 부작용은 또 있다. 불법 사금융 시장의 팽창이다. 법정 최고금리 규제를 지키기 어려운 영세 대부업체는 지방자치단체 등록을 포기하고 불법 고금리 영업으로 넘어간다. 금융위에 따르면 등록 대부업체 수는 지난해 7∼12월에만 326곳이 줄었다.
불법 사채시장은 돈을 빌려주는 방법부터 추심 행태까지 일반인의 상상을 뛰어넘는다. 회계사 사무소에서 일하는 신모 씨(39·여)는 5월 지인의 추천으로 한 미등록 대부업체에 돈을 빌리러 갔다가 차마 입에 담지 못할 모욕을 당했다.
할머니와 단둘이 사는 그는 얼마 전 허리를 다쳐 휴직 중이었다. 그 와중에 할머니가 세상을 떠났고, 장례를 치러야 하는데 모아둔 돈도 없었다. 한 친구가 사무실 팩스로 대부 광고가 들어왔다며 전화번호를 알려줬다.
“일단 만나자고 해서 사무실에 갔더니 대뜸 ‘우린 매일 돈을 갚을 수 있는 사람에게만 빌려 준다’고 하더라고요. 이 말이 무슨 뜻인지 몰랐죠. 보통 직장인은 월급이나 주급을 받으니 돈을 빌려주면 짧아야 주 단위로 상환할 수 있다고 얘기했어요. 그랬더니 ‘노래방에서 일을 해서 갚으면 된다’고 하더라고요.”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이모 씨(30·여)도 사채를 이용한 뒤 끔찍한 경험을 했다. 이 씨는 20대 때 친한 언니의 빚보증을 섰다가 3000만 원의 빚을 졌다. 이 씨 역시 과거에 대형 대부업체를 이용한 적이 있었지만 이번에는 대출 승인을 받지 못했다.
100만 원 남짓한 월급으로 아빠, 동생과 생활비를 나눠 쓰다 보니 생활은 늘 쪼들렸다. 사채로 50만 원을 빌렸는데 이자 상환일이 하루 늦어지자 그들은 폭언을 쏟아냈다.
“돈 빌릴 때 가족이랑 친구들 번호 다 적어 갔거든요. ‘우리 깡패랑 연결된 업체야. 이자 제때 안 주면 매일 친구들에게 전화를 하겠다’는 말을 들으니 겁부터 나더라고요.”
“사채 피해자 대책 반드시 수반돼야”
사채로 고통받았던 이들은 정부가 일단 최고금리를 낮추기로 결정했다면 대부업체에서 밀려나는 저신용자를 위한 대책을 반드시 함께 마련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직원 월급을 더 이상 미룰 수 없어 사채를 썼다는 김모 씨(42)는 정부의 정책자금 지원이 강화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김 씨는 “대부업체에서도 대출을 거절당한 뒤 중소기업진흥공단에 자금을 신청했는데 역시 ‘불가’ 판정을 받았다”며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데 정부 쪽에는 의지할 곳이 아무 데도 없었다”고 씁쓸해했다.
학원 강사인 정모 씨(47)는 “사채에 한 번 당해본 사람은 그래도 법적 테두리 안에서 돈을 빌릴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행복한 것인지 안다”며 “저신용자가 대부업체를 이용하지 못하면 사채에 손댈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인 만큼 대책이 필요하다”고 호소했다.
조남희 금융소비자원 대표는 “무조건 규제를 강화하기보다는 현재 법정 최고금리 수준이라도 잘 지켜지도록 불법 사금융을 철저히 단속하는 게 오히려 서민들을 위한 길일 수 있다”며 “불법 대부업체를 양성화하는 것도 대안”이라고 강조했다.
송충현 기자 balgu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