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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소한 도서관]“남북 정치상황에 관한 꿈꾸기였다”…‘우리가 물이 되어’

입력 | 2017-08-28 17:33:00


강은교 시인의 작품은 정교한 감성을 넘어 사색과 성찰의 경지로 나아간다. 동아일보DB


‘우리가 물이 되어 만난다면

가문 어느 집에선들 좋아하지 않으랴

우리가 키 큰 나무와 함께 서서

우르르 우르르 비 오는 소리로 흐른다면


흐르고 흘러서 저물녘엔

저 혼자 깊어지는 강물에 누워

죽은 나무뿌리를 적시기도 한다면

아아, 아직 처녀인

부끄러운 바다에 닿는다면


그러나 지금 우리는

불로 만나려 한다

벌써 숯이 된 뼈 하나가

세상에 불타는 것들을 쓰다듬고 있나니


만 리 밖에서 기다리는 그대여

저 불 지난 뒤에

흐르는 물로 만나자


푸시시 푸시시 불 꺼지는 소리로 말하면서

올 때는 인적 그친

넓고 깨끗한 하늘로 오라.’


-강은교 시 ‘우리가 물이 되어’


둘은 지금 불같다. 뼈가 숯이 됐을 정도다. 그래서 시인은 다독인다. 불 지난 뒤에 흐르는 물로 만나자고.

‘우리가 물이 되어’에 처음부터 끝까지 흐르는 것은 물의 이미지다. 우르르 비오는 소리, 깊어지는 강물, 부끄러운 바다…. 키 큰 나무와 뿌리도 모두 물을 필요로 한다. 푸시시 불을 끄는 것도 물이다.

모든 것을 태울 듯한 불을 쓰다듬고 덮어주는 게 물이다. 물은 죽은 나무뿌리도 살리고 뜨거운 불도 꺼뜨린다. 물뿐일까. 사랑도 그렇게 죽어가는 것, 다 타서 재만 남은 줄 알았던 것에 숨을 불어넣는다. 물이 오래도록 흐르고 흘러 넓은 바다와 하늘까지 닿듯, 오랜 사랑은 하늘과 바다처럼 넉넉하게 품는 힘을 갖는다.

‘우리가 물이 되어’는 사랑의 시편으로 널리 알려졌지만, 강은교 시인은 “남북의 정치상황에 관한 꿈꾸기였다”고 밝혔다. 시인이 독자들에게 작품을 보낸 뒤부턴 작품을 읽어내는 건 독자의 몫이지만, 통일의 시이든 연모의 시이든 오래도록 흐르고 흐르는 사랑의 마음에 대한 소중함을 깨닫게 하는 힘이 있음은 분명하다. 북한의 도발이 가파른 요즘 더욱 예사롭지 않게 읽히는 시편이다.

김지영 기자 kimj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