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과 진실의 불일치 보여준 소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개선장군처럼 출소 前총리와 ‘사법부의 정치보복’ 주장 여권에 靑, 다주택자 참모진 해명까지 개인 기억의 편리한 재편집, 역사의 유리한 윤색 경계해야
고미석 논설위원
2011년 영국 맨부커상 수상작인 줄리언 반스의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는 청년기와 노년의 삶을 오가면서, 자기 본위의 주관적 기억과 실재한 객관적 과거사 간의 틈을 날카롭게 파고든다. 영화로 만들어져 국내 개봉 중인데 개인의 과거, 집단의 역사에 대한 사유의 무게가 남다르다.
‘역사는 부정확한 기억이 불충분한 문서와 만나는 지점에서 빚어지는 확신이다.’ 작품의 한 구절은 때마침 형기를 채우고 출소한 전 국무총리를 둘러싼 일련의 사태와 대칭을 이룬다. 또 다른 구절. ‘우리는 살면서 우리 자신의 인생 이야기를 얼마나 자주 할까. 그러면서 얼마나 가감하고, 윤색하고, 교묘히 가지치기를 하는 걸까’도 그렇다. 당당한 전직 총리와 ‘평생 동지들’의 태도나, 증거에 입각한 대법 판결을 ‘정치 보복’이라 우겨대는 집권 여당의 맞장구는 많은 이들을 기함하게 만들었다. 기억이 얼마나 심하게 꼬이고 멋대로 각색될 수 있는지 궁극의 경지를 새삼 일깨운 탓이다. 오죽하면 진보 언론도 그 왜곡된 자가당착을 호되게 나무랐을까. 이는 진보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닐 것이다. 정치의 문제도 못 된다. 그 한참 이전의 단계, 상식의 차원이자 인성의 문제일 수 있다.
새 정부가 전방위적으로 서둘러 시행하는 ‘적폐 청산’이 자칫 역사의 윤색이 되지 않을까도 걱정이지만, 권력 핵심에 들어앉은 세력이 기억을 편리하게 편집하는 습관도 걱정스럽다. 27일 청와대는 참모진의 절반이 2주택 이상 보유자인 사실에 대해 이례적으로 해명 자료를 냈다. ‘은퇴 대비’ ‘울산대 교수 재직 시 사놓은 것으로 매각하려 했으나 불발’ 등 어디서 많이 듣던 식의 변명과, ‘값을 뚝 떨어뜨려서라도 매각하겠다’는 믿거나 말거나 발언은 말한 사람 듣는 사람 모두의 수준을 동시에 떨어뜨리는 것으로, 안 하느니만 못했다.
‘모든 사람의 기억은 각자의 사적인 문학’이란 올더스 헉슬리의 말처럼 사연 없는 사람 없고 핑계 없는 사람 없다. 다만 여론이 불쾌하다 못해 쓴웃음을 짓는 것은, ‘8·2대책’을 내놓으며 다주택자를 공공의 적처럼 몰아붙인 청와대가 내부자에 대해 다 그럴 만한 사정이 있는 것이라며 둘러대고 발을 빼는 언행불일치 때문이다.
지난해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 ‘나, 다니엘 블레이크’를 만든 영국의 좌파 감독 켄 로치(81)를 다룬 다큐멘터리가 최근 EBS를 통해 방영됐다. ‘왜 자기 조국을 혐오하는가’란 비판이 나올 만큼 영국 사회의 불편한 현실을 도발적으로 드러낸 감독. 평생 사회적 약자의 편에 섰고 정의를 위해 싸웠고, 그래서 노동자를 배신한 노조 간부들과 노동당의 위선에도 가차 없는 강펀치를 날렸다. 그 과정에서 1980년대 그가 제작한 다큐와 연극의 방영과 공연이 무산됐고 일거리는 완전히 끊겼다. 그 시기에 상업광고로 생계를 유지하면서 맥도널드 광고를 제작한 것을 ‘영원한 수치’로 회고한다. 배신한 이들을 질책하면서 똑같은 행동을 하고 말았다는 처절한 자기반성이다
비겁함은 실수가 아니라 선택이라 말한 로치 감독도 최근 구설에 올랐다. 팔레스타인 문제로 ‘이스라엘 문화 보이콧’을 주도한 그는 록밴드 ‘라디오헤드’의 이스라엘 공연을 반대했지만 정작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버젓이 이스라엘에서 개봉된 탓이다. 이를 둘러싸고 로치 측은 몰랐다고 해명했으나 현지 배급사는 ‘말도 안 되는 소리, 지금껏 영화 배급하면서 로치로부터 한 번도 반대 의견을 들은 적 없네’라고 반박했다. 로치 같은 올곧은 감독도 기억과 진실 사이에서 가끔 길을 잃는 것을 보면, 양지만 좇는 한국의 제도권 엘리트들이 갈 길은 참으로 멀다 싶기도 하다.
기억과 진실 사이에 깊은 골이 있다. 기억은 기록보다 불확실하다. 이를 인정하는 것이야말로 과거를 바로 보는 첫걸음이다. 그것이 국가사회의 신의를 확립해야 할 공직자의 복무 정신이기도 하다. 이제 안전지대에 들어왔다는 안도감과 자만심에 진실을 외면한다면 비겁함을 선택하는 것이다. 자기 내면을 비추는 거울이 그리 맑고 깨끗하지 못하다면, 다른 무수한 거울들이 총합적으로 반영된 ‘기록’의 엄중함을 받아들이는 것. 이는 최소한의 양식, 혹은 양심일 것이다.
고미석 논설위원 mskoh119@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