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장에서 큰돈 번다” 속여 中 끌고가… “기차요금-식비 갚아라” 지옥 내몰아 日패전뒤 같은 처지 7명과 中잔류, 1999년 국적 회복… 4년뒤 한국으로 30일 발인… 천안 망향의동산 영면
‘일요일에는 군인들이 너무 많이 줄을 서서 기다렸습니다. 주로 밥과 된장을 먹고 지냈습니다….’
28일 세상을 떠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하상숙 할머니(89)가 생전에 밝힌 위안부 생활이다. 1999년 할머니가 한국 국적을 회복하는 과정에서 법무부에 제출한 ‘중국에서의 생활진술서’에 담긴 내용이다. 하 할머니의 말을 옮긴 것으로 편지지 3장 분량이다. 30일 본보가 입수한 진술서에는 고향을 떠나 머나먼 중국에서 위안부 생활을 강요받은 할머니의 고통이 그대로 묻어났다.
진술서에 따르면 할머니는 고향을 떠나 서울 장충단 근처의 여관에 갔다. 전국 팔도에서 온 또래 여성들이 속속 도착했다. 그렇게 40여 명이 모였다. 할머니가 “공장에서 일하면 큰돈을 버는 게 진짜냐”고 묻자 “헤이타이(兵隊·군인)를 환송하는 위문단 일”이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그래도 할머니는 의심하지 않았다.
일본 패전 후 할머니는 우한에서 생활했다. 비슷한 처지의 할머니가 7명 더 있었다. 1996년 9월 김원동 씨(72)가 하 할머니를 만나러 왔다. 그는 중국에 살던 위안부 피해자들의 귀국 운동을 주도한 사람이다. 할머니의 진술서는 김 씨가 이때 받아 적은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법무부는 할머니의 국적을 한국으로 판정했다. 그러나 귀국에는 4년이 더 걸렸다. 북한 국적인 데다 그곳 할머니들의 ‘대표’였기에 더 조심스러웠다. 김 씨는 “출국할 때는 북한 여권, 입국할 때는 한국 임시여권을 쓰도록 하는 등 치밀하게 귀국을 추진했던 기억이 난다”고 회상했다. 할머니 별세 후 김 씨는 2박 3일간 빈소를 지켰다. 30일 발인 후 할머니는 충남 천안시 ‘해외 동포를 위한 국립 망향의 동산’에 묻혔다.
● 위안부 할머니 또 별세… 35명 생존
이날 또 한 분의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사단법인 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은 이날 오후 3시경 대구의 한 병원에서 이모 할머니가 노환으로 별세했다고 밝혔다. 향년 93세. 1924년 함경북도 청진에서 태어난 할머니는 경북 경주시의 고모 집에서 생활하다 일본군에 끌려갔다. 대만의 위안소에서 고초를 겪던 할머니는 광복 후 경주로 돌아왔고 2001년 7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로 등록됐다. 이 할머니가 세상을 떠나면서 정부에 등록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239명 가운데 생존자는 35명으로 줄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