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 반민특위 특별법정에 선 일제 특무대수사관 염석진.몸에 박힌 6개의 총알자국을 가리키며 당당히 자신의 반민족행위를 부인했다. 실제로도 ‘대동신문’의 사장 이종형은 무죄를 뻔뻔히 주장하며 고함을 외쳤다. ② 1949년 안옥윤(가운데 여자)과 상하이 임시정부 시절 염석진으로부터 배신당한 영우(왼쪽)는 마침내 친일파의 단죄를 위해 총을 들었다. 사진출처|영화 ‘암살’ 캡처
■ 영화 ‘암살’
독립투사들 희생 끝에 되찾은 해방 조국
정권의 비호 아래 다시 득세한 친일파들
역사의 단죄, 판타지로 그쳐서 되겠는가
단순히 이야기의 결말만은 아닐 터이다. 수많은 상징과 은유가 포함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들여다보는 이들이 스스로 그 결론을 맺어주길 바라는 ‘열린 결말’로서 갈무리하기도 한다. 한 편의 영화가 관객에게 안겨주는 진한 여운이 발원하는 또 하나의 지점, 마지막 장면, 바로 ‘라스트 씬’(Last Scene)이다. 그래서 ‘라스트 씬’은 어쩌면 한 편의 영화가 드러내려는 모든 것이 담긴, 단 하나의 장면일지 모른다. 때로는 ‘에필로그’로서 더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경우도 많아서 ‘라스트 씬’의 여운은 더욱 깊고 커지기도 한다. 표기법상 맞는 표현인 ‘라스트 신’이 아닌 ‘라스트 씬’이라 쓰는 까닭도 거기에 있다.
#1933년 11월8일
그로부터 16년의 세월이 흐른 1949년 그는 ‘밀정 행위로 독립운동을 방해’하고(반민족행위처벌법 4조4항), “군경의 관리로서 악질적인 행위로 민족에게 해를 가한”(같은 법 4조6항) 혐의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 특별재판에 넘겨진다. “내 몸 속에 일본놈들의 총알이 6개나 박혀 있다”며 자신의 친일행위를 철저히 부인한 그는 “증거 불충분”으로 반민특위 특별검찰의 기소마저 비웃으며 공소 유지를 무산시킨다. 단죄의 대상이었던 친일 앞잡이에서 해방 이후 경찰이 된 그에게 해방 정국의 그 혼란스러움은 “좋은 세상”으로만 보였다.
#1933년 2월27일
만주 항일무장조직의 유일한 여성 운동가였던 61세 남자현이 일제에 체포됐다. 일제에 협력하던 중국 만주괴뢰정권의 전권대사 부토를 제거하기 위해 무기를 가지러 하얼빈에 도착한 뒤였다. 옷 속에는 의병으로 나섰다 전사한 남편의 피 묻은 군복을 껴입고 있었다.
경북 영양의 유학자 남정한의 딸로 태어나 19살에 아버지의 제자 김영주와 결혼한 남자현은 5년 만에 남편을 잃는다. 아들을 키우며 시부모를 모시고 살아가던 그는 1919년 3월1일 서울에서 독립선언문을 각처에 배포했다. 그리고는 곧장 만주로 넘어가 독립운동단체 서로군정서에 입단했다. 그는 군자금 조달과 일제 총독 저격 시도 등 활동을 펼친 유일한 여성대원으로 알려져 있다. 1931년 왼손 무명지를 잘라 ‘조선독립원’이라 혈서를 쓰고 잘려진 손가락을 동봉해 국제연맹에 보내기도 했다.(한겨레신문사 ‘발굴 한국현대사 인물1’ 참조)
“만주에선 지붕에서 물이 새거나 벽이 부서져도 고치질 않았어. 곧 독립이 되면 고향으로 돌아갈 텐데 뭐 하러 고치겠어. 알려줘야지. 우린 계속 싸우고 있다고.”
조국 독립을 위해 목숨을 내던진 이들의 미소가 친일청산에 실패한 역사를 꾸짖는 듯하다. 사진출처|영화 ‘암살’ 캡처
#1947년 4월9일
그렇게 지난한 싸움 끝에 되찾은 조국. 1945년 9월2일 미군의 미주리함 갑판에서 일본 외무대신 시게미쓰 마모루(윤봉길 의사의 의거로 한쪽 다리를 잃었다)가 항복문서에 조인하던 시각, 상하이 임시정부 청사에서 김원봉(조승우)은 김구(김홍파)와 쓰디 쓴 술잔을 나눈다. 주상욱(조진웅), 황덕삼(최덕문) 등 독립을 위해 목숨을 내던진 이들의 이름을 떠올리며 김원봉은 “너무 많이 죽었습니다. 사람들에게 잊혀지겠지요? 미안합니다”며 회한에 젖는다.
하지만 해방된 조국은 이들의 편이 아니었다. 김원봉은 이날 그 악랄하다고 소문났던 일제 고등계 형사 출신으로 새로운 권력 아래서 다시 경찰 간부가 된 노덕술에게 뺨을 얻어맞고 체포된다. 미 군정의 포고령을 위반했다는, 좌익의 혐의였다. 그리고 무려 사흘 밤낮 고문을 당했다. 청산되어야 할 친일파 노덕술은 어떻게 이런 짓을 자행할 수 있었을까.
#1948년 10월23일
광복을 맞았지만 일제강점기 34년 11개월 동안 숱한 동포들을 체포하고 고문하고 죽음에 이르게 한, 민족과 조국을 팔아 제 배를 불리며 영달을 꾀한 친일파들을 단죄하지 않고서는, 식민의 상흔을 지우지 않고서는, 온전한 독립국가로서 위상을 회복할 수 없을 것이었다. 이를 위한 반민특위가 우여곡절 끝에 이날 정식 출범했다. 일제강점기 비행기공장을 운영했던 박흥식을 ‘검거 1호’로, 반민특위는 이듬해 8월 와해되기까지 친일행위 682건을 취급했다. 하지만 실질적인 처벌을 받은 반민족행위자는 7명에 불과했다. 그나마도 훗날 대부분 풀려났다.
#1949년 6월6일
오전 7시 서울 남대문의 반민특위 사무실이 습격당했다. 이미 그 조직마저 친일파들에게 장악당한 경찰의 소행이었다. 반민특위 특경대원 등 직원들이 무참히 폭행당했다. 염석진의 석방 역시 친일세력의 힘이었다. “반민특위 해체” 요구 시위가 벌어지던 시각, 염석진의 반민족행위를 고발하려는 증인이 살해됐다. 반민특위 출범을 전후해 불안감을 느낀 정권과 친일세력의 거센 ‘저항’은 얼마나 집요했던가. 해방 직후 공산세력에 맞서기 위해 ‘행정 경험자 우대’를 명분으로 한 미 군정과 정권의 비호 아래 친일세력은 나라 각 부문을 이미 장악해버렸다.
반민특위 발족 과정에서도 집요하게 방해공작을 펼친 이들은 마침내 무력시위에 나선다. 1948년 10월 수도청 수사과장 최난수와 노덕술 등 일부 경찰 수뇌부가 반민특위 위원장 김상덕, 대법원장이자 반민특위 특별재판관장 김병로 등 반민특위 관계자 15명의 암살을 모의했다. 백민태라는 직업 테러리스트가 동원됐다. 하지만 그의 자수로 모의자들은 체포됐다. 경찰은 이에 반발했고 반민특위 사무실을 쳐들어갔다.
그 사이 친일파 단죄를 주장해온 국회 소장파 의원들이 “빨갱이”로 몰려 경찰에 체포됐다. 이는 반공의 가면으로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려는 친일세력에게는 너무도 좋은 명분이 되었다. 결국 반민특위는 와해되어갔다.
독립군 저격수 안옥윤은 염석진에게 “왜 동지를 팔았나?”고 묻는다. 염석진은 “해방될지 몰랐으니까”라며 뻔뻔하게 답한다. 그런 염석진을 향해 총구를 겨누는 안옥윤은 “염석진이 밀정이면 죽여라!”라는 “16년 전 임무!”를 수행한다. 염석진은 몸에 박힌 “일본놈들의 총알”처럼 6발의 총탄을 맞고 황량한 벌판에서 숨진다.
해방 이후 다양한 모습으로 변신해 또 다시 세상 위에 군림한 그 숱한 친일의 뻔뻔함에 대한 단죄는 이런 ‘판타지’로서만 가능한 것일까. 안옥윤의 총탄은 바로 그 단죄의 엄중한 의무를 묻고 있는지 모른다.
● 영화 ‘암살’
2015년 1270만 관객 흥행작. 1930년대 조선주둔군 사령관 카와구치 마모루와 친일파 강인국을 제거하기 위해 식민지 경성의 한복판으로 뛰어든 독립투사들의 이야기. 여성 독립운동가 남자현을 비롯해 김상옥 등 실제 항일운동에 목숨을 바쳤던 인물들을 모티브 삼았다. 또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 김구, 의열단 단장 김원봉이 등장해 당대 항일전선의 긴장감을 드러낸다. 최동훈 감독이 연출하고 전지현, 이정재, 하정우 등이 주연했다.
엔터테인먼트부 전문기자 tadad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