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승달 모양의 터에 자리한 경주 월성(반월성). 문화재청 제공
안영배 전문기자·풍수학 박사
신라는 건국 초기부터 풍수 설화가 등장한다. ‘삼국유사’는 지리술에 밝은 탈해가 토함산 정상에 올라갔다가 초승달 모양의 땅을 발견하고는 자신의 집으로 차지했다고 전한다. 탈해가 지목한 터가 현재 경주의 월성(月城)이다. 탈해는 터의 기운을 받아서인지 신라 4대 왕이 됐고, 반월성(半月城)으로도 불리는 월성은 5대 파사왕 때부터 왕궁으로 사용됐다.
흥미롭게도 신라를 포함한 고대 삼국은 초승달 모양의 터를 길하게 여겼다. 신라의 월성, 고구려의 평양성, 백제의 사비성은 그 지세가 모두 초승달 형국이었다. 초승달은 시간이 흘러가면서 점점 크기가 자라나 보름달로 완성된다. 마찬가지로 초승달의 땅 기운을 받은 사람들은 시간이 흐를수록 융성해질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게 된다. 실제로 풍수의 형세파(形勢派) 이론에서는 초월형(初月形) 혹은 신월형(新月形)의 땅에 거주지나 묘를 쓰면 후손 대대로 고관대작이 끊이지 않는다고 여긴다.
신라의 삼국통일이 우리 역사를 한반도에 가둬놓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비판하는 시각도 없지 않다. 그러나 풍수적 견해에서 볼 때 신라는 삼국통일의 주역이 될 만했다. 삼국 중 가장 완벽한 반월형의 터를 이루고 있던 곳이 경주의 월성이었다. 신라인들은 비단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반월형 기운을 최대한 활용하기 위해 태양의 기운도 끌어들였다.
신라는 태양의 힘이 가장 미약한 동지(冬至) 때 해가 떠오르는 동남방의 기운을 귀하게 여겼다. 초승달처럼 자라나는 기운을 선호한 것이다. 경주 월성을 기준으로 동지 때 해가 뜨는 동남방(방위각 118도)으로는 경주 낭산(狼山)과 더 멀리 토함산이 자리하고 있다. 직선으로 그으면 동지일출선(冬至日出線)이 된다.
경주의 이른 시기 고분에서 대부분 동지일출선인 동남방에 시신을 안치한 관이 놓여 있는 것도 우연이 아니다. 경주의 고분군 중 한국이 독자적으로 처음 발굴 조사한 천마총은 목관(木棺) 주인공의 머리가 동남방(107도)을 향하고 있다. 천마총과 유사한 구조인 황남대총 북분 역시 동남방(106도)으로 관이 놓여 있다.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이 어설프게 발굴한 금관총 역시 유사한 구조로 관이 설치돼 있었다. 모두 신라 초기 왕릉급 무덤들이다.
신라 역대 통치자 중 동지일출선 기운을 가장 적극적으로 활용한 왕은 제27대 선덕여왕이다. 신라인들은 성품이 어질며 총명한 선덕여왕을 ‘성조황고(聖祖皇姑)’라고 불렀다. 예지력까지 갖춘 선덕여왕은 첨성대(국보 제31호)를 동지일출선상에 세우도록 했다. 풍수적 시각에서 보자면 첨성대는 천문관측 시설일 뿐만 아니라 신라의 융성을 비는 점성대(占星臺)이자 제의 장소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현재 월성은 정부 지원으로 복원사업이 진행 중이다. 2025년 완성을 목표로 한 복원작업을 지켜보면서, 월성의 통일 기운도 함께 되살아나 우리 국운에 도움이 되기를 간절히 기원하는 요즘이다.
안영배 전문기자·풍수학 박사 oj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