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광장 세종대왕 동상. 동아일보DB
○ 여론조사와 토론으로 반대 설득
오늘은 세종의 개인적인 삶과 의사소통에 대해 생각해 보려 합니다. 세종은 22세에 셋째 아들로 임금이 되었습니다. 세종이 즉위한 후에도 아버지 태종은 4년 동안 살아 정치에 관여했습니다. 또한 아버지의 신하이자 친구인 대신이 조정에 가득했습니다. 정치하기 참 힘들었을 겁니다. 여러분이라면 어떻게 행동했을까요?
경남 사천 세종대왕 태실지 세종대왕(재위 1418∼1450년)의 태(胎)를 봉안한 태실이 있던 곳이다. 세종 대왕 태실은 정유재란(1597년) 때 왜적에 의해 도굴, 파손되어 선조 34년 (1601년)에 수리하였으며, 영조 9년(1733년)에는 태실비를 세우고 태실을 수리한 기록문서 ‘태실수의궤’를 남겼다. 그 후 일제강점기인 1929년에 태 실임야가 민간인에게 팔렸고, 태실은 경기 양주로 옮겨 갔다고 한다.
세종은 대신들의 의견뿐만 아니라 하급 관리 및 백성들의 의견도 최대한 많이 듣고 정책에 반영했습니다. 대표적인 제도가 공법(貢法)입니다. 공법은 일종의 토지에 대한 조세제도입니다. 땅의 주인은 토지의 좋고 나쁨과 풍년과 흉년에 따라 토지에 대한 세금을 나라에 바쳤습니다. ‘전분 6등법과 연분 9등법’이라고 부릅니다. 지금까지 연구한 자료에 의하면 세종은 15년 동안 공법을 연구하고, 약 17만 명을 대상으로 여론조사를 실시했다고 합니다. 오랜 연구와 의견 수렴을 거쳐 공정한 조세제도를 만들고 시행한 것입니다. 세계사에서도 유례를 찾기 힘든 일입니다. 공정하고 좋은 제도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오늘날 정책을 담당하는 모든 사람이 깊이 새겨보아야 할 교훈이라고 생각합니다.
○ 국익 위할 땐 과감한 결단
훈민정음 해례본(간송미술관 소장) 정인지 등 집현전 학사들이 중심이 되어 세종 28년(1446년)에 만든 훈민정음의 한문해설서이다. 책이름을 글자 이름인 훈민정음과 똑같이 ‘훈민정음’ 이라고도 하고, 해례가 붙어 있어서 ‘훈민정음 해례본’ 또는 ‘훈민정음 원본’이라고도 한다.
갑자기 세종 28년(1446년)에 제작 사실을 알리고 있습니다. 조정의 신하 대부분이 한글창제와 반포를 결사적으로 반대했습니다. 최만리와 정창손의 반대 상소가 대표적입니다. 반대하는 신하들은 ‘언문을 만드는 것은 중국을 버리고 오랑캐와 같아지려는 것’이라고 외쳤습니다. 당시의 양반과 관리들은 지식과 문화는 자기들만 소유하고, 일반 백성에겐 필요 없거나 무익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자신들이 가진 최고의 특권을 일반 백성과 공유하고 싶지 않았을 겁니다. 그러니 얼마나 반대가 심했겠습니까.
여러분이라면 이때 어떤 결정을 내릴까요? 세종은 많은 신하들 의견을 따르지 않고, 독단적으로 한글을 반포합니다. 그리고 한글의 편리한 사용을 위해 용비어천가 10권, 훈민정음, 동국정운 등의 책을 완성합니다. 진정한 스승과 리더는 중요하고 옳은 일이라고 확신한다면, 반대를 무릅쓰고라도 그 일을 이루는 사람입니다. 세종이 바로 그런 분이었습니다. 한글이 있었기에 우리들은 함께 지식과 문화를 공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국민의 지식과 교육 수준이 높은 나라에서 서로 경쟁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아마도 이런 이유로 세종대왕이 태어난 5월 15일을 스승의 날로 정하지 않았을까요?
이환병 서울 용산고 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