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레이션 강동영 기자 kdy184@donga.com
안영식 전문기자
스포츠는 예측불허의 접전이 펼쳐져야 그 진수를 맛볼 수 있다. 반면 자신이 응원하는 선수나 팀의 패배가 예상되는 경기를 보는 것은 고역이다. 그것이 국가대표라면 더욱 그렇다.
대표적인 예가 지난달 중순 필리핀에서 열린 제19회 아시아여자배구선수권대회 태국과의 준결승전이다. 한국은 0-3으로 완패했다. 질 수도 있다. 하지만 ‘질 수밖에 없는 경기였다’는 게 문제다. 협회장 탄핵 등 내홍을 치른 대한배구협회의 총체적 부실이 고스란히 드러난 결과였다.
한국-태국 4강전 생중계를 지켜보는 내내 안타까웠다. 체력이 이미 바닥난 선수들의 표정은 어두웠다. 움직임은 둔했고 실수도 잦았다. 체력이 뒷받침되지 못하면 ‘불굴의 정신력’은 한낱 구호에 불과하다. 반면 세대교체에 성공한 태국의 젊은 선수들은 펄펄 날았다. 1세트가 끝난 뒤 패배를 직감했고, 착잡했다. 어지간한 배구 팬이라면 같은 심정이었을 것이다.
체력 관리도 실력이다. 하지만 협회가 각종 국제대회의 경중(輕重)을 가리지 않고 눈앞의 성과에 급급해 1진 대표팀을 혹사시키면 어찌 버텨내겠는가. 그래서 이번 아시아선수권에 2진 대표팀이 출전한 중국을 꺾고 동메달을 차지한 것은 위안이 될 수 없다.
국내에 프로리그가 출범한 종목의 스타급 선수들이 국가대표팀 차출을 꺼리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다. 연봉이 수억∼수십억 원인 귀하신 몸이 자칫 부상이라도 당하면 낭패이기 때문이다. 주요 선수를 내놓지 않으려는 ‘구단 이기주의’도 한몫한다.
이번 여자 배구대표팀 엔트리 논란은 태극마크가 ‘멍에’로 취급당하고 있다는 것을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선배 선수가 장도에 오르기 직전 공항 인터뷰에서 유망주 후배가 대표팀에 포함되지 않은 것을 꼬집으며 “고생하는 선수만 고생한다”고 작심 발언을 했다. 특정 선수의 실명까지 밝혔다는 것은 동업자 정신을 감안하면 이례적이다. 그만큼 상황이 심각하다는 방증이다.
그나마 남자 프로선수에겐 올림픽과 아시아경기 등에서 좋은 성적을 거둘 경우 병역 혜택이라는 ‘당근’이 주어지지만 소속팀에서 고액 연봉을 받고 있는 여자 프로들에겐 동기부여가 마땅치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곰곰이 생각해보자. 국가대표팀이 각종 국제대회에서 연전연패, 참패당하는 종목의 국내 프로리그가 과연 인기를 끌 수 있을까. 이런저런 핑계로 국가대표팀 차출을 회피하는 선수가 과연 팬들의 사랑을 받을 수 있을까.
한국 양궁은 30여 년간 세계 최강으로 군림하고 있다. 국가대표 선발 과정과 협회 운영에서 어떤 잡음도 들리지 않는다. 원칙(공정성, 투명성)을 철저히 지키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아마추어와 프로 종목의 여건은 다르다. 하지만 처한 상황에 맞게 세워진 원칙을 흔들림 없이 지켜, 선수들 입에서 ‘국가대표=고생’이라는 푸념은 나오지 않게 해야 한다.
북한의 핵실험과 미사일 도발, 살충제 계란 파동 등으로 국민들의 가슴은 답답하다. 스포츠가 그 먹먹한 가슴을 뚫어줘야 한다. 스포츠의 역할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태극전사는 그 첨병이다.
안영식 전문기자 ysah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