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발의 청춘’ 등 1960년대 흥행작 쏟아내
신성일(왼쪽) 엄앵란을 당대의 스타로 만든 김기덕 감독의 청춘영화 ‘맨발의 청춘’(1964년). 동아일보DB
요즘 영화 팬들은 같은 이름에서 ‘피에타’ ‘나쁜 남자’의 김기덕 감독을 떠올리지만 고인은 한국 영화사에 묵직한 발자취를 남긴 영화인이다. 1961년 ‘5인의 해병’으로 데뷔한 뒤 마지막 연출작인 스포츠 영화 ‘영광의 9회말’(1977년)까지 17년간 66편의 영화를 연출하며 ‘흥행 보증수표’ 타이틀을 얻었다.
배우 신성일 엄앵란 씨를 일약 스타덤에 올린 청춘영화 ‘맨발의 청춘’(1964년)부터 ‘용사는 살아있다’ ‘124 군부대’ 같은 전쟁영화, ‘친정어머니’ 등의 가족드라마, SF 괴수영화 ‘대괴수 용가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장르의 작품을 선보였다. 특히 신-엄 커플을 실제 부부로까지 연결시킨 ‘맨발의 청춘’은 개봉 당시 23만 관객을 모으며 흥행에 성공했고, ‘대괴수 용가리’는 국내 SF 영화의 뿌리가 됐다.
고인과 비슷한 시기에 활동했던 김수용 감독은 “고인과 나흘 전 통화했는데 건강상태가 좋지 않아 걱정했다”라며 “내가 알고 있는 모든 사람 중 가장 인간적인 사람이자 진정한 영화인”이라고 애도했다.
2011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열린 ‘김기덕 회고전’의 프로그래머로 참여했던 전찬일 영화평론가는 “고인은 한국영화사의 르네상스로 평가받으면서도 정작 장르적 다양성은 자리 잡지 못했던 1960, 70년대에 새로운 시도로 한국 영화의 저변을 넓혀온 ‘장르 영화의 달인’”이라며 “생전에 영화계 후배들에게 술도 잘 사는 매우 인간적인 분이었다”고 말했다.
김 감독은 마지막 연출작 이후에는 영화감독을 은퇴해 서울예술대학 학장, 동랑예술센터 총감독, 영상물등급위원회 위원 등을 지냈고 2015년부터 지난해까지 대한민국예술원 연극·영화·무용 분과 회장을 맡았다. 1962년 제1회 대종상 신인감독상을 수상했고 2003년 옥관문화훈장을 받았다.
유족으로 부인 안숙영 씨와 아들 영재 영기 씨(연세봄정신건강의학과 원장), 딸 은아 씨, 사위 민동순 씨(SK네트웍스 상무), 며느리 최선이(대한항공 기내식 기판사업본부장) 민자경 씨가 있다. 빈소는 서울 신촌세브란스병원, 발인은 9일 오전 11시. 02-2227-7556
장선희 기자 sun10@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