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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과 내일/홍수용]을 빠진 갑질 개혁

입력 | 2017-09-08 03:00:00


홍수용 논설위원

대형 유통사가 납품업체 종업원을 동원해 시식행사를 할 때 인건비의 절반을 유통사가 분담토록 하는 정책이 발표된 게 지난달 13일이다. 이달 6일 갑질 개혁을 강조하려고 유통사 대표들을 모은 자리에서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이 쏟아낸 말 중 가장 독했던 것은 ‘개혁의 결과는 비가역적일 것’이었다. ‘개혁은 되돌릴 수 없다’고 하면 되는데 어려운 표현으로 발언에 무게를 더하려 한 것으로 보인다.

그 덕에 단호한 이미지가 부각됐다고 해도 이 개혁은 첫 단추를 잘못 채웠다. 납품업체 파견 직원 인건비를 갑들이 나눠 내도록 한 방안에 유통사들이 펄펄 뛰는 상황을 옹호하려는 게 아니다. 오히려 유통사들의 반대 논리가 구태의연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파견 직원의 인건비를 분담하면 비용 문제로 판촉행사 자체가 줄어들 것, 그 결과 고용이 대폭 감소할 것, 경제가 부정적 영향을 받을 것 등등. 다급한 심정은 알겠다. 하지만 판촉행사가 없어지면 마트에 파견됐던 직원들은 자기 회사로 복귀하면 된다. 마트 판촉직이 우리 사회가 부작용을 감수하면서 지켜야 하는 양질의 일자리도 아니다. 무엇보다 유통업계 ‘바이어’들은 유행과 적절한 할인 폭이라는 대단히 주관적인 잣대로 납품업체를 선정하고 있다. 갑질이 생겨나는 진짜 원인은 더 깊숙이 숨어 있는지 모른다.

이 상태에서 ‘비가역적인 개혁’을 강행할 경우 의도와 달리 을들의 기회를 박탈할 수 있다. 현장에서 영세 납품업체들은 판매대금의 30, 40%를 훌쩍 넘는 수수료를 내고 있다. 그러고라도 악착같이 유통사에 입점하려 한다. 소비자를 만날 수 있는 기회 때문이다. 판촉행사 인건비는 1인당 하루 6만 원꼴이다. 보통 한 상품에 대해 2주일 정도 행사를 하니 3명을 고용한다면 제품 하나를 소비자와 직접 만나 홍보하는 데 드는 비용은 250만 원꼴이다. 이 정도의 판촉행사비를 계속 감수하겠다는 사업자가 얼마나 되는지 정부는 먼저 조사해야 했다.

정부 규제로 유통업체 내부 판촉행사가 없어지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마트에서 내몰린 상인은 승합차에 물건을 싣고 거리로 나서야 할 것이다. 그나마 값이 매우 싸다면 경쟁력이 있을 것이다. 매우 고가이거나 매우 저가인 상품이 양분하고 있는 것이 백화점과 마트 밖 시장이다. 중간 가격대 제품을 만드는 회사는 무한경쟁에서 말라죽을 수도 있다.

이번 대책 덕분에 납품업체의 비용이 줄어든다고 해도 그 효과는 일시에 그칠 가능성이 높다. 오뚜기의 판촉행사용 인건비가 1인당 하루 6만 원에서 3만 원으로 줄었다고 하자. 남은 3만 원이 오뚜기의 금고로 바로 들어오지 않는다. 홍보비든 인테리어비든 다른 형태의 비용에 전가될 수 있다. 오뚜기가 3만 원을 갖겠다고 고집을 부린다면 마트는 말 잘 듣는 다른 납품업체와 계약할 것이다. 갑질 개혁이 효과를 내려면 길거리로 나간 중소업체를 위해 정부가 대신 홍보해 주고, 유통사가 납품업체를 바꿀 때마다 쫓아다니며 감시해야 한다. 그건 시장경제가 아니다.

갑질 개혁은 대중의 분노를 연료 삼아 정책에 드라이브를 걸지만 현실을 고려하지 않으므로 결과를 예측하기도 어렵다. 최선의 개혁은 을이 갑을 고를 수 있을 정도로 을의 경쟁력을 높이는 대책이지만 이런 호흡이 긴 정책에는 아무도 관심이 없다.

무모함과 단견이 유통 분야에 그치지 않고 현 정부 경제정책 전반을 관통하고 있다. 정부가 소득주도 성장정책, 부동산정책, 에너지정책의 답을 먼저 정해 두고 거기에 맞는 공식을 억지로 만들고 있는 건 아닌가. 다른 풀이과정이 있다는 쓴소리에 귀를 막은 채 비가역적인 결과로만 달려간다면 지난 정부와 다를 게 없다. 노무현 정부 때 장관을 지낸 한 인사는 “작은 정의에 매달리면 큰 정의가 무너진다”고 경고했다.
 
홍수용 논설위원 legma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