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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과 내일/서영아]일본에서 느껴지는 ‘코리아 패싱’

입력 | 2017-09-09 03:00:00


서영아 도쿄 특파원

북한이 발사한 중거리탄도미사일이 일본 상공을 통과한 지난달 29일부터 6차 핵실험을 강행한 3일까지,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4차례 통화했다. 핵실험 직후인 3일 밤에는 중국을 방문 중인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전화를 연결하는가 하면, 영국 독일 인도의 지도자와 의견을 교환하며 대북 압박을 호소했다. 아베 총리는 “전화 회담 자체가 억지력”이라고 주변에 말했다고 한다.

이런 가운데 7일 일본 후지TV는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달 29일 아베 총리와의 통화에서 한국이 대북 대화에 집착한다며 “(구걸하는) 거지 같다”고 비난했다고 보도해 파문을 불렀다. 곧바로 청와대가 강한 유감을 표하고 일본 외무성도 “그런 사실이 없다”는 입장을 취했지만, 후지TV는 심야뉴스에서도 같은 보도를 내보냈다. 보도에서는 미일 정상의 잇단 통화는 군사적 압력에 엉거주춤한 태도를 보이는 한국과 그에 짜증을 내는 미국 사이를 일본이 중재해야 했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평소 거친 말버릇도 그렇지만, 5일 산케이신문도 트럼프가 아베 총리와의 전화 회담에서 한국의 대응을 비판했다고 한 줄 썼던 걸로 봐서 일본 정부 내에서 이 같은 정보가 흘러나온 것은 사실인 듯하다. 굳이 정보를 흘리고 이를 보도하는 데서 한국을 모욕하고 한미관계를 이간질하려는 의도가 의심되기도 하지만, 이는 미일이 한반도 문제를 주도하고 한국은 제외되는 ‘코리아 패싱(Korea Passing)’의 단면이 드러난 것 아닌가 싶다.

아베 총리와 트럼프 대통령은 동북아 문제에 관한 한 작은 일도 상담하는 사이다. 지난해 11월부터 시작된 두 정상 간의 밀월을 볼 때마다 솔직히 속이 타는 심경이 되곤 한다. 아베 총리가 트럼프 대통령과 대화하고 골프를 치며 한국에 대해 어떤 이미지를 심어줬을지 짐작이 가기 때문이다.

참고로, 아베 총리를 비롯한 일본 오피니언 리더 상당수는 ‘한국은 약속을 지키지 않는 나라’라고 진심으로 믿고 있다. 여기에는 문재인 정권이 ‘미래지향’을 말하면서도 말끝마다 일본의 아킬레스건인 역사 문제를 끄집어내는 것에 대한 불만도 크게 작용하고 있다. 가령 북한이 괌 주변 포격계획을 발표한 불과 며칠 뒤, 문 대통령은 8·15경축사에서 강제징용 피해자에 대한 남북 공동조사를 제안해 일본을 경악시켰다.

문재인 정권의 외교안보 정책은 미일 외교가의 문법으로 보자면 모호해 보였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이 발등의 불이 된 지금은 상황이 급박하다.

‘핵보유국’ 북한이 한국을 제치고 미국과 1 대 1 대결에 집착하는 것을 제어할 수단을 한국은 사실상 가지고 있지 못하다. 더 큰 문제는 한반도 관련 모든 당사국과의 관계가 과거 어느 때보다 비우호적이라는 점이다. 중국은 마치 속국에 하듯 사드 보복을 하고 있고, 미일과의 관계도 삐걱거린다. 이 상태가 지속되면 한국은 한반도 문제에서 발언권 없는 객체로 전락하지 않을까 걱정이다.

사드 배치 강행을 결정한 지금 문 정권은 전통적인 한미동맹의 편에 설 수밖에 없다는 판단을 내린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일본과의 관계도 달리 접근해야 하지 않을까. 말 그대로 미래지향적 한일관계가 필수요소가 된다.

트럼프-아베의 잦은 통화에서 읽을 수 있듯, 일본을 배제한 한미동맹은 불가능하다. 미국은 중국 견제를 위해 일본의 힘에 절대적으로 의지할 수밖에 없다. 강고한 미일동맹이 우선이고 어찌 보면 한국은 종속적인 위치다. 우리는 세상 돌아가는 것을 제대로 보고, 겸허한 자세와 치밀한 전략하에 이 엄혹한 현실에 임하고 있는가. 확실한 것은 국내에서의 인기만으로는 이 현실을 헤치고 나갈 수 없다는 것이다.

서영아 도쿄 특파원 sy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