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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진단]기업인들의 침묵

입력 | 2017-09-11 03:00:00


김용석 산업부 차장

과거에 동방플라자로 불린 서울 세종대로 삼성생명 본사 사옥이 부영에 팔린 지 1년 반이 지났다. 그 이후 달라진 건 빌딩 지하 식당가다. 오랜만에 지하를 둘러보고 깜짝 놀랐다. 썰렁했던 지하 공간에 이름난 프랜차이즈 식당이 가득 들어섰다.

예전에 삼성이 이 건물을 가지고 있을 땐 그럴듯한 식당 하나 들여오기 힘들었다. 삼성 직원 손님을 다 뺏긴다는 빌딩 밖 주변 상인들의 눈총 때문이었다. 삼성 지하 빵집에선 삼성 사원증을 보여주는 사람한테만 물건을 파는 일도 있었다. 하지만 삼성 간판을 떼니 상황이 달라졌다. 큰 식당가가 들어오는데도 주변 상인들이 잠잠하다. 삼성이 아니라서 반대할 명분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삼성만 아니면 된다’는 것인데, 이중 잣대라는 말은 이럴 때 쓰라고 만들어졌나 싶다. 분위기가 이렇다 보니 ‘삼성만 이 나라를 떠나면 참 평화로워질 것 같다’는 농담까지 나온다. 물론 이럴 경우 매년 삼성과 삼성 임직원이 내는 수조 원(작년 기준 법인세만 4조6000억여 원)의 세금 수입을 포기해야겠지만 말이다.

대기업에 대한 사람들의 감정이 곱지 않다 보니 이들과 같은 묶음에 들어가는 것을 꺼리는 일도 생겼다. 얼마 전 준(準)대기업 집단으로 지정된 네이버는 이해진 창업자의 총수 지정을 피하기 위해 여러 이유를 댔다. 이 중에는 “총수로 지정되면 구태적인 경영을 한다는 선입관 때문에 외국에 나가서 사업할 때 손해 본다”는 논리도 있었다. 수출 비중이 80%가 넘는 제조 대기업이 들으면 허탈해할 얘기다.

씁쓸한 일화들의 밑바닥에는 뿌리 깊은 반기업 정서가 깔려 있다. 요즘 들어 반기업 정서가 심해지면서 기업인들은 활기를 잃고 침묵하고 있다. 법을 어겨서 문제가 된 기업에 대해서라면 반감을 가질 만하다. 하지만 정상적인 활동을 하는 기업에도 반기업 정서는 큰 부담이 되고 있다.

이렇게 된 데는 정부를 포함한 공공부문 탓도 크다. 기업을 향한 정부 관계자들의 목소리는 비판 일색이다. 기업을 대변하는 경제단체가 정부의 일자리 정책에 반대 의견을 내자, 박광온 국정기획자문위원회 대변인은 “아주 편협한 발상”이라고 비판하는 목소리를 냈다. 이어 문재인 대통령은 “양극화를 만든 주요 당사자로서 반성하라”고 일갈했다. 이런 분위기에 대해 며칠 전 만난 한 대기업 최고경영자(CEO)는 “노무현 정부는 좌회전 깜빡이를 켜고 우회전을 했는데, 이번 정부는 좌회전 깜빡이를 켜고 좌회전을 하는가 싶더니, 아예 유턴을 하는 것 같다”고 평가했다.

얼마 전 윤부근 삼성전자 대표는 1시간 반 동안의 기자회견에서 10번 가까이 ‘무섭다’, ‘두렵다’, ‘답답하다’는 말을 되뇌었다. 정신없이 변하는 경영 환경 속에서 중국에서 쥐어 터지고, 미국에서 박대당하는 기업인들은 윤 대표의 말에 크게 공감하고 있다. 지금 정부는 기업의 목소리에 얼마나 귀를 기울이고 있는가? 국가 경제와 사회 발전에 대한 기업인의 기여를 얼마나 정당하게 평가하고 있는가? 이런 질문에 기업인들은 국민만 보고 일하겠다는 정부가 실제로는 지지율만 보고 일하면서 반기업 정서를 활용하고 있다는 섭섭함을 털어놓고 있다. 기업에 대한 이해와 대화가 부족하다는 것이 전반적인 정서다.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도 재임 시 기업인들의 집을 찾아 교류했다. 조직이든 국가든 성공적으로 운영하기 위해서는 ‘책임을 다하라’고 윽박만 질러선 곤란하다. 정부가 침묵하는 기업들의 내면의 목소리에도 귀를 기울였으면 한다.

김용석 산업부 차장 y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