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주 가정교사 ‘숙사’
전통적인 한문 수업 모습. 동아일보DB
조선시대 공부 말고 할 줄 아는 게 없는 선비가 선택할 수 있는 직업은 많지 않았다. 훈장 노릇이라도 하면 좋지만 그러려면 최소한 집은 있어야 한다. 집조차 없는 가난한 선비는 입주 가정교사로 남의 집에 얹혀살며 아이들을 가르쳤다. 이른바 ‘숙사(塾師)’다.
숙사는 찢어지게 가난한 선비가 입에 풀칠이라도 하려고 선택하는 직업이었다. 숙사의 역할은 학생이 글을 깨쳐 과거에 합격하면 끝이 났다. 그러면 숙사는 실업자가 돼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야 했다. 학생도 과거 합격 뒤에는 숙사를 무시했다. 저명한 관료와 학자는 한 번만 만나도 스승으로 떠받들었지만 여러 해 자신을 가르친 숙사는 스승으로 여기지 않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성해응은 “정승 집안의 귀한 자제들이 숙사를 업신여기고 치욕을 주며 못 하는 짓이 없다”고 했다. 이런 탓에 숙사들의 존재는 좀처럼 드러나지 않았다.
이귀상(李龜祥)은 가난하지만 똑똑하고 단정한 선비였다. 서울에 올라온 그는 김성응 집안의 숙사가 돼 그의 두 아들을 가르쳤다. 그중 한 사람이 정조의 장인 김시묵이다. 이귀상은 여느 숙사와 달리 엄격했다. 잘 가르친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이웃에 사는 오원이 자기 집 숙사로 모셔 와 두 아들의 교육을 맡겼다. 오원의 아들 오재순 오재소 형제는 모두 판서의 지위에 올랐다. 그들은 입을 모아 숙사의 가르침 덕이라고 했다.
훗날 이귀상이 세상을 떠나자 오재순의 아들 오희상이 묘지명을 지었다. “공은 스승의 권위를 엄격히 세우고 절도 있게 수업했다. 차근차근 자세히 가르쳐 똑똑한 사람이나 어리석은 사람이나 모두 유익했다. 반드시 먼저 의리와 이익을 분명히 구별하고 방향을 알려주었으니, 글이나 가르치고 마는 정도가 아니었다. 지금까지도 명성이 자자하다.”
어린 시절부터 함께 먹고 살며 가르친 숙사의 영향은 절대적이었다. 조선의 교육을 담당한 건 퇴계나 율곡 같은 큰 스승만이 아니라 이름 없는 숙사들이었다.
장유승 단국대 동양학연구원 책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