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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일담]이승엽은 드래프트 몇 순위 출신?

입력 | 2017-09-11 11:42:00


올해를 마지막으로 은퇴하는 ‘국민 타자’ 이승엽도 입단식 때는 이렇게 앳된 모습이었습니다. 동아일보DB.



정답은 없습니다. 그 어떤 프로야구팀도 신인 지명 회의(드래프트)에서 이승엽(41·삼성)을 지명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신인 입단 방식’이 지금과 달랐던 겁니다.

오늘(9월 11일)은 2018 프로야구 2차 신인 드래프트가 있는 날입니다.
한국 프로야구(KBO 리그)는 선수 보류(保留) 조항이 있는 폐쇄형 리그입니다. 이에 따라 한국에서 학교를 나온 선수가 프로야구 무대에서 뛰려면 드래프트를 거치거나 아니면 육성선수(옛 연습생)로 입단한 다음 정식선수로 신분을 바꿔야 합니다.

그런데 1995년까지는 ‘고졸 연고 자유계약’ 혹은 ‘연고지명’이라고 부르는 제도가 따로 있었습니다. 각 구단은 이 제도를 활용해 연고 지역 고교 3학년 선수하고는 지명 절차 없이 입단 계약을 맺는 게 가능했습니다. 그냥 계약만 하면 곧바로 입단입니다. 1995년 경북고를 졸업한 이승엽 역시 이 제도로 삼성에 입단한 케이스입니다.

이승엽 계약 소식을 전한 1994년 12월 30일자 동아일보.



프로야구 초창기에 이렇게 연고 지역 선수 영입 문호를 넓혀둔 건 물론 고교야구 인기를 프로야구로 연결하려는 의도였습니다. 1986년까지는 아예 대졸 선수도 연고 지역 고교를 졸업했다면 인원 제한 없이 1차 지명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연고 지역 선수를 무한정 영입할 수 있는 건 미국은 물론 고교 야구 인기가 하늘을 찌르는 일본에도 없는 제도였습니다.

이 제도 원산지는 쿠바. 이용일 KBO 초대 사무총장은 대한야구협회(KBA) 부회장이던 1978년 쿠바야구협회장을 만난 자리에서 “우리나라(쿠바)에서는 모든 선수가 고향 팀에서만 뛴다. 그래서 야구가 국민 스포츠가 됐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이 전 총장은 이 논리로 1981년 정권 실세들을 설득했습니다. ‘반공’의 서슬이 시퍼렇던 그때 군사정권에서 공산주의자 피델 카스트로의 야구 제도를 받아들이게 만들었습니다.

피델 카스트로(왼쪽)와 2006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준우승 당시 쿠바 대표팀 2루수였던 율리에스키 구리엘. 동아일보DB.



1995년에도 대졸자는 드래프트를 거쳐야 했기에 이승엽이 대학수학능력시험에서 2.5점만 더 받았어도 지명 절차가 필요했을지 모릅니다. 원래 이승엽은 고교를 졸업하면 한양대에 진학할 예정이었거든요. 무엇보다 아버지 이춘광 씨가 아들의 대학 진학을 바랐습니다. 이승엽은 심지어 고교 졸업 전에 한양대에서 미리 ‘예비 대학생’ 생활도 했습니다.

묘한 분위기가 퍼진 건 여름방학 이후 삼성이 적극적으로 러브콜을 보내면서부터. 낌새가 이상하다고 느낀 한양대는 수능 날 아침 야구부 관계자를 보내 이승엽이 고사장 안으로 들어가는 것까지 확인했습니다. 그런데 이승엽이 수능에서 37.5점을 받는 바람에 입학할 수 없게 됐습니다. 당시 체육 특기생으로 대학에 입학하려면 최소 40점은 받아야 했거든요. 대학 진학보다 삼성 입단 쪽으로 마음이 기운 이승엽이 1교시 시험만 보고 고사장에서 당구장으로 도망쳐 생긴 일입니다. (이건 아버지 이춘광 씨 이야기. 이승엽 본인은 “1교시만 실력으로 보고 나머지 시간은 그냥 찍었다”고 이야기 한 적이 있습니다.)

한양대에서 반발하자 이승엽은 일반 수험생 자격으로 입학시험을 치르겠다고 밝히기도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한양대에서 희망하던 일이었을 뿐. 당시에는 이런 제도 때문에 이승엽 뿐만아니라 각 프로 구단에서 이런 식으로 대학에 가려던 선수를 빼 오는 일이 드물지 않았습니다.

어떻게든 이승엽을 데려오려던 한양대는 그가 대입 시험에서 낙방하면 실업팀에 입단시켜 재수를 종용한다는 방침까지 세웠지만 실제로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한국야구위원회(KBO)는 1996년부터 고졸 선수도 드래프트를 거쳐야 하는 것으로 규정을 바꿉니다. 또 이렇게 지명 받은 선수가 대학 졸업 때까지 구단 보류권을 인정하게 제도를 손질하면서 지명을 받은 선수도 대학에 진학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줍니다.

문제는 당시 2차 지명 인원 제한이 없었다는 것. 그 결과 이해 신인 드래프트 때 쌍방울은 28명을 지명했고, 삼성과 현대도 각 25명을 뽑았습니다. 한화와 해태(현 KIA)에서 지명한 숫자도 23명이나 됐습니다. 그렇게 8개 구단에서 180명의 이름을 부르고 나서야 2차 지명이 끝났습니다. 최대 10명까지 지명할 수 있는 현재 제도를 적용하면 8개 구단인 당시는 80명이 한계였는데 100명(125%)을 더 뽑았던 겁니다. 결국 KBO는 이듬해 2차 지명 선수를 12명으로 줄였습니다.

이승엽과 김건덕 사이 우정과 갈등을 소재로 한 뮤지컬 ‘너에게 빛의 속도로 간다’ 포스터. 동아일보DB.



1995학년도 수능 때 이승엽만 일부러 시험을 망쳤던 건 아닙니다. 이승엽은 한양대에서 막내 생활을 함께하던 경남상고(현 부경고) 3학년 김건덕(1976~2016)에게도 “우리 수능 떨어지자(망치자)”고 제안을 합니다. 그래서 둘은 1번부터 5번까지는 1번, 6번부터 10번까지는 2번, 이런 식으로 답을 적었습니다.

김건덕도 시험을 망치고 아버지께 “지 시험 떨어졌으예”라고 이야기했지만 “니는 실업계(현 전문계)라 수능 커트라인은 의미가 없다”는 답을 듣고 말았습니다. 하릴없이 한양대로 돌아가 연습을 마치고 TV를 보는데 마침 친구가 삼성 입단식을 하는 장면을 보게 된 겁니다. 무슨 영문인지 몰라 이승엽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들려오는 한 마디. “친구야, 내는 인문계다.”

김건덕은 청소년 대표팀 에이스를 지낸 유망주 중 유망주였지만 그런 투수들에게 으레 생기는 일처럼 어깨 부상이 찾아오고 말았습니다. 그는 대학 졸업반이던 1998년 신인 드래프트 대상자였지만 결국 이름을 불러주는 팀을 만나지 못해 유니폼을 벗어야 했습니다. 이후 아마추어 야구에서 지도자로 생활하다 지난해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승엽이 동아일보 지면에 처음 이름을 올린 1992년 9월 20일자.



오늘도 누군가는 제일 먼저 이름이 불리고, 누군가는 100번째까지 기다려도 끝내 자기 이름을 듣지 못할 터. 그래도 열아홉, 스물셋은 아직 성패를 논하기에 너무 이른 나이입니다. 야구에서 실패했다고 인생에서 실패하는 것도 아닙니다. 국민 타자 이승엽도 시작은 실패한 투수였습니다. ‘진정한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고 믿었기에 우리는 이승엽이 실패한 투수였다는 사실도 기억할 수 있습니다. 언제나 그렇습니다. 마침표를 예쁘게 찍는 자만이 처음을 남깁니다.


황규인 기자 kin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