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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은영의 부모마음 아이마음]집안 문제는 아이에게도 솔직히 알려주세요

입력 | 2017-09-13 03:00:00

<38> 가정이 위기일때




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오은영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소아청소년클리닉 원장

초등학교 5학년 민철이는 요즘 학교에 가고 싶지 않다. 왠지 불안해져 자꾸만 집으로 가고 싶어진다. 학교에서는 친구들과 눈도 마주치지 못하는데, 남자아이들은 무서워서 자꾸 피하게 된다. 하지만 집에만 가면 난폭한 야수로 돌변한다. 특히 아빠가 뭐라고 한마디만 하면 뭐든 손에 잡히는 대로 던지고 불같이 화를 낸다. 민철이가 이토록 정서가 불안하고, 아빠를 미워하게 된 데에는 이유가 있기는 하다. 꽤 잘사는 편이었던 민철이 집은 하루아침에 그야말로 폭삭 망했다. 아빠가 주식 투자를 하다가 실패해서 전 재산을 날리고, 집까지 팔아야 하는 상태에 이른 것이다. 작은 집으로 이사를 한 것은 물론이고 다니던 학원도 거의 끊었다. 무엇보다 그 과정 내내 엄마 아빠의 싸움이 끊이질 않았다. 엄마는 싸울 때마다 울부짖었다. “내가 못 살아! 당신 때문에 우리 꼴이 이게 뭐야!”라고 소리쳤다. 그럴 때마다 민철이는 책상에 엎드려 울었다. 아빠가 미웠다. 아빠 때문에 우리 집이 이렇게 되었고, 내 인생이 망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이 갈수록 아빠에 대한 원망과 분노는 커져만 갔다.

그런데 엄마와 민철이가 원하는 대로 이 문제가 해결되려면 타임머신을 타고 아빠가 주식을 하기 전의 시간으로 돌아가거나 어디선가 큰돈이 뚝 떨어져서 빚을 다 갚고 이전 집으로 이사를 가는 것뿐이다. 그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다고 계속 아빠를 원망하며 사는 것은 아이에게 끔찍하리만큼 불행한 삶이 될 것이다.

물론 이런 시련은 아이에게 되도록 주지 않는 것이 좋다. 하지만 이미 발생했을 때는 부모가 무엇보다 행동을 조심해야 한다. 아이들은 경제적 위기도 위기지만 그것 때문에 부모가 소리를 지르며 싸우는 모습을 지켜봐야 하는 것을 더 괴로워한다. 아직 어리고 가치관이 충분히 형성되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에 아이 앞에서 부모가 심하게 싸우는 건 좋지 않다. 아니, 절대로 해선 안 되는 일이다.

가정이 경제적으로 힘들어졌거나 부부 사이에 위기가 왔을 때 사춘기 아이의 부모는 특히 더 지혜롭고 현명하게 행동해야 한다. 이 시기 아이들은 이분법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가정의 위기를 초래한 사람을 일방적으로 미워하기 시작한다. 민철이가 아빠를 이렇게 증오하게 된 데에는 엄마의 영향도 크다. “당신이 그런 짓만 안 했어도 우리가 지금 이 고생은 안 할 거 아냐!” 하면서 모든 책임을 아빠에게 전가했다. 모든 잘못이 아빠에게 있다고 하더라도 아이 앞에서 이런 원망 섞인 말을 내뱉으며 포효하는 것은 삼가야 한다. 아이는 자신도 억울하다고 생각한다. 문제는 그런 억울함 때문에 자기는 어떤 행동이든 해도 괜찮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나를 이렇게 힘들게 만들었으니 부모에게 욕을 하고 대들면서 버릇없이 굴어도 괜찮다며 자신의 모든 행동을 합리화한다.

살면서 모든 상황을 예측할 수는 없다. 어느 순간 어떤 상황이 일어날지, 누구를 만날지는 아무도 모른다. 좋은 사람을 만날 수도 있지만 나를 이유 없이 싫어하고 모함하는 사람을 만날 수도 있다. 나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을 내 뜻대로 통제할 수는 없다. 그런데 그럴 때마다 원망과 분노에 허우적대며 자신을 포기해 버리면 결과적으로 자기만 손해다. 오히려 바뀐 상황에 가능한 한 빨리 적응하고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하는 게 지혜로운 처사이다.

집안에 안 좋은 일이 생겼을 때는, 부모가 직접 아이를 앉혀놓고 이렇게 얘기해준다면 좋겠다. “정말 미안하게 됐구나. 내 행동을 변명할 생각은 없어. 그저 너는 이번 일을 통해 꼭 배웠으면 좋겠다. 한 번의 실수가 엄청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걸 말이야.” 혹은 “정말 미안해. 이런 일이 없었으면 좀 더 좋은 환경에서 좋은 교육을 시켜줄 수 있었을 텐데…. 하지만 너를 사랑하는 마음은 변함이 없다는 사실 하나만은 꼭 알아줬으면 좋겠어. 우리 함께 이 위기를 잘 이겨내 보자” 하면서 진솔한 이야기를 나눴으면 한다.

부모가 이 가정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 어떤 계획을 가지고 있는지, 아이는 무엇을 도와주어야 하는지 등도 되도록 구체적으로 알려준다. 그래도 원망은 할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하면 불안을 조금은 덜어낼 수 있고, 자기 자신을 망치는 행동까지는 하지 않는다. 위기를 이겨내는 부모의 행동에서 배우는 바도 생긴다. 무엇보다 이렇게 해야 최소한 가정의 위기가 아이의 위기로 번지는 일은 막을 수 있다.
 
오은영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소아청소년클리닉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