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딩크 측근으로 알려진 노제호 거스히딩크재단 사무총장이 6월 19일 김호곤 부회장에게 보낸 모바일메신저 전문. 이 문자를 통해 한국축구와 축구협회의 맨 얼굴이 가감 없이 드러났다. 사진제공 | 대한축구협회
히딩크측, 절차 무시한 여론몰이식 접근 잘못
메시지 받은 사실 번복한 축구협 대응도 미숙
러 평가전때 양측의 대화 투명하게 공개해야
모든 논란의 시발점은 모바일 메신저를 통한 메시지 한 통이었다. 거스 히딩크(71·네덜란드) 감독의 국내 대리인(거스히딩크재단 노제호 사무총장)은 6월 19일 대한축구협회 김호곤(66) 부회장에게 카카오톡 메시지를 보냈다.
“부회장님∼2018러시아월드컵 한국 국대(국가대표팀) 감독을 히딩크 감독께서 관심이 높으시니 이번 기술위원회에서는 남은 2경기만 우선 맡아서 월드컵 본선 시킬 감독 선임하는 게 좋을 듯 합니다. 월드컵 본선 감독은 본선진출 확정 후 좀더 많은 지원자 중에서 찾는 게 맞을 듯 해서요∼∼∼ㅎ”
전임 기술위원장 이용수(58) 부회장이 슈틸리케 감독과 동반사퇴를 발표한 것은 6월 15일, 협회 정몽규(55) 회장이 김 부회장에 기술위원장을 맡긴 것은 6월 26일이었다. 새 기술위원회의 출범을 알린 축구협회의 공식발표도 이 때 나왔다. 히딩크 측은 대표팀 사령탑 선임에 아무런 권한이 없었고, 결정권자도 아닌 김 부회장에게 보낸 메시지를 접촉이라고 주장한다.
이후에도 노 총장은 2통의 문자를 더 보냈다. 물론 아무런 답변을 받지 못했다. 이후 양 측의 전화통화는 1차례 있었다. 우즈베키스탄과의 러시아월드컵 아시아 최종예선 경기를 마치고 귀국한 김 부회장은 9월 7일 인천국제공항에서 자택으로 돌아가던 도중에 노 총장의 전화를 받았다.
일부 언론이 제기한 ‘수차례 문자, 전화통화’의 진실은 일방적인 메시지 3통, 1차례 전화연결이 전부다. 여기서 시기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전화통화는 ‘히딩크 논란’이 들불처럼 번진 뒤였다. 한 방송채널을 통해 나온 ‘히딩크, 한국대표팀 부임 희망’보도는 대표팀 신태용(47) 감독이 9월 6일 타슈켄트 현지에서 기자간담회를 열기 직전에 나왔다.
먼저 여론몰이를 하고 나중에 전화를 한 것은 제대로 된 접촉이라고 보기 어렵다. 통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더욱이‘ㅎ’까지 담긴 문자를 진지한 제안으로 받아들일 사람은 얼마나 될까. 어느 조직도 이런 종류의 메시지로 제안을 하지도 받지도 않는다. 최소한 이메일로 진지한 양식의 서류를 보낸 뒤 상대의 답을 기다리는 것이 기본이다.
그렇다면 한 번 되묻고 싶다. 히딩크 감독이기 때문에 월드컵 지역예선은 소화하지 않아도 되느냐고 말이다. ‘명장=월드컵 본선만’이라는 생각은 대체 어디에서 어떠한 배경에서 등장했을까. 당시 우리 대표팀은 최악의 수렁에 빠져 있었다. 한국축구를 그토록 사랑하고, 많은 국민들에게 존경을 받는 인물이라면 그래서 위기에 빠진 대표팀을 이끌겠다는 의지가 정말 있었다면 슈틸리케 감독의 경질 직후 “내가 먼저 돕겠다”고 했어야 옳다.
문제는 또 있다. 히딩크 감독 측은 어떤 자격으로 월드컵 지역예선용 감독을 협회에 선임하라고 했을까. ‘히딩크 감독께서 (러시아월드컵 본선진출시) 한국 대표팀에 관심이 높으시니’를 전제로 깔면 덥석 받아들여야 하는가. 더욱이 임시든, 본선까지 책임지든 대표팀 감독 선임 권한은 히딩크 감독 측에 있지 않다. 어느 나라도 특정 외국인 감독에게 이런 자격을 주지 않는다. 더구나 대리인의 문자를 보고 중요한 결정을 협회가 내려야 할까.
물론 협회의 대응도 미숙했다. 김 부회장이 “한 번도 히딩크 측과 접촉한 적 없다”고 하다가 휴대폰 문자·통화내역을 확인하고 입장을 번복한 것은 분명 잘못됐다. 애초에 “(노 총장의) 메시지가 무례한 내용이고, 귀 담아 들을 필요가 없어 대응하지 않았다. 그 후 잊고 있었다”고 처음부터 밝혔다면 훨씬 매끄럽게 일이 매듭지어질 수 있었다. 그랬다면 대중은 일찍이 내막을 알게 됐을 것이고 지금처럼 흥분하지도 않았을 수도 있다.
이렇듯 한국축구는 문자 한 통으로 흔들리고 여론이 들끓어오를 정도로 불안한 상황이다. 그만큼 여론은 대한축구협회를 의심하고 한국대표팀의 능력을 믿지 못해 문제가 커졌다. 이번 사태의 본질은 신뢰의 상실이다.
남장현 기자 yoshike3@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