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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소서에 파묻힌 청춘… “정권 바뀌어도 우린 바뀐게 없어”

입력 | 2017-09-19 03:00:00

[청년이라 죄송합니다]취준생들 다시 만나보니




6월 12일 국회에서 추가경정예산안 시정연설에 나선 문재인 대통령은 취업준비생의 고통을 전하면서 “이력서 100장이 기본”이라고 했다. 이어 “청년 일자리는 자식들의 문제이자 부모들의 문제”라며 조속한 추경 통과를 요청했다. 이 장면을 지켜보면서 희망이 생겼다는 청년 취업준비생이 적지 않았다. 하지만 이후 취업 성적표는 희망보다 ‘절망’에 가깝다. 당장 외환위기 이후 최고치를 기록한 올해 8월 청년(15∼29세) 실업률(9.4%)이 단적인 예다. 동아일보 특별취재팀이 ‘청년이라 죄송합니다’ 기획시리즈를 준비하며 심층 인터뷰를 한 전국 취준생 135명을 추적해 이들의 목소리에 다시 귀를 기울인 이유다.

○ 와 닿지 않는 정부의 일자리 정책

14일 다시 만난 취준생 임우영 씨(24·충북대 토목공학과)의 생활은 본보 기자가 처음 만난 3월과 비교해 달라진 게 없었다. 그는 여전히 매일 도서관에서 인적성검사 문제집을 풀거나 자기소개서를 나흘에 한 번꼴로 완성해 원서를 넣는 일을 반복했다. 임 씨는 “정부의 일자리 창출 정책이 제 취업에는 별 도움을 주지 못한다”며 “공공부문 일자리 창출도 좋지만 민간기업이 일자리를 많이 늘려야 하는데, 정부가 이에 대한 고민이 없는 것 같다”고 했다.

정윤식

정윤식 씨(26·서울대 중어중문학과)는 해외교환학생 경험에, 영어와 중국어능력시험(HSK) 점수도 최상으로 올렸다. 이번 여름방학에는 직무 경험을 쌓기 위해 인턴으로도 일했다. 그럼에도 그는 “실업률이 역대 최고인데도 이제는 뭐가 힘든지도 잘 모르겠다. 계속 힘들다 보니 그냥 면역이 됐다”며 “기업이 채용 인원을 더 늘릴 수 있는 정책을 보강하면 좋겠다”고 말했다.

취준생 135명에게 ‘청년 일자리 확대를 위해 가장 필요한 정책’을 묻자 ‘규제 완화 등을 통한 민간기업 활성화’라는 응답(41.5%)이 가장 많았다. 문재인 정부가 추진하는 공공부문 일자리 확충이 달갑지만은 않다는 얘기다.

○ 정부의 블라인드 및 합동 채용엔 부정적 의견도

취재팀이 다시 만난 취준생들은 현 정부의 청년 일자리 정책에 ‘청년의 목소리가 빠졌다’고 하소연했다. 블라인드 채용 확대나 공공기관 합동채용,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등에 대한 불만이었다.

광주 건강보험공단 인턴으로 일하며 공공기관 취업을 준비 중인 선석 씨(26·전남대 사학과 졸업)는 블라인드 채용을 생각하면 오히려 ‘불안하다’고 했다. 그는 “취지는 나쁘지 않지만 면접 시 정말 블라인드인지 의구심이 크다”고 했다. 취준생들이 가장 우려하는 것은 ‘역차별’이다. 공대생은 건설사 지원 시 기사 자격증이 있으면 가산점을 주기 때문에 1년간 휴학하고 자격증을 2개 정도 따는 일이 많다. 취준생 최원기 씨(25)는 “블라인드 방식의 자기소개서만 보고 1차 당락을 결정하면 열심히 준비한 사람은 뭐가 되느냐”고 반문했다. 문재인 정부는 ‘블라인드 채용 방식’을 모든 공공기관으로 확대할 방침이다.

이윤재

유사업무 공공기관이 같은 날짜에 필기시험을 치르는 ‘공공기관 합동채용’에 대해서도 비판적 목소리가 높았다. 대학생 김지선 씨(24·여)는 “하루 시험을 망쳐도 다음 기회가 많아 부담이 적었지만 이제는 한 번 잘못 보면 끝”이라고 하소연했다.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을 두고도 현실성이 부족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공공기관에서 시간제 계약직으로 일하는 이윤재 씨(25·여·청주대 경영학과 졸업)는 “애초에 숫자가 많지 않은 ‘기간제 계약직’만 정규직으로 전환하는 건 보여주기식 정책”이라고 비판했다.

○ 그래도 취업에 성공한 청년들

취준생의 절반 이상인 54.1%는 ‘청년 취업 문제가 앞으로도 쉽게 해결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청년이 선호하는 기업들이 대규모 신규 채용에 나서지 않는 데다 더 나은 일자리를 얻기 위해 취업을 미루면서 청년 고용 지표들이 더욱 악화될 가능성이 높아서다.

송동준

하지만 이들은 높디높은 취업 장벽을 뛰어넘기 위해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기획시리즈 당시 스펙에 집착하는 청년들을 뜻하는 ‘호모스펙타쿠스’로 소개된 취준생 송동준 씨(25·전주대 금융보험학과)는 최근 KT에 입사했다. 송 씨는 “스펙 쌓기에 집착하지 않고 전북 지역 20개 통신사 대리점을 찾아가 직무가 어떻게 이뤄지는지 보고 들었다”며 “처음엔 대리점 직원들이 경쟁사 스파이인 줄 알고 경계했지만 그런 노력에 결국 취업했다”고 말했다.

8월 최악의 실업률을 현 정부의 책임으로만 볼 수는 없다. 정책 효과가 나타나려면 최소 6개월 뒤 지표를 봐야 해서다. 그럼에도 민간 채용을 확대하려면 기업들의 불확실성을 줄여줘야 한다는 목소리가 크다. 권순원 숙명여대 경영학부 교수는 “중국의 사드 보복 여파와 최저임금 인상 등으로 기업이 채용을 늘리기 어려운 상황”이라며 “정책의 예측가능성을 높여주는 등 정책적 보완이 있어야 일자리 창출이 가능하다”고 강조했다.

청년들이 선호하는 일자리를 만들려면 새로운 서비스산업을 활성화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크다. 조준모 성균관대 경제학과 교수는 “영국은 금융과 정보기술(IT)을 융·복합한 서비스가 나오면서 새로운 산업생태계를 형성해 청년 일자리가 크게 늘었다”며 “일자리 정책 하나에 일희일비하기보다는 경제의 체질 개선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빼곡한 삼선 슬리퍼… 청년들 “올해가 기회, 친구 절반이 공시 준비”▼

노량진 공시생 학원가에선


15일 서울 동작구 노량진동의 한 공무원 시험 준비학원 외부 흡연구역에 수험생 20여 명이 삼삼오오 모여 머리를 식히고 있었다. 쉬는 동안에도 공무원시험 준비생(일명 공시생)들은 시험 이야기 삼매경이었다. 시험이 얼마나 남았는지 손으로 헤아리는 수험생도 있었다.

같은 시간 동작경찰서 앞 카페는 빈자리를 찾기 어려울 정도였지만 대화 소리조차 들을 수 없었다. 자리마다 트레이닝복 차림에 슬리퍼를 신은 공시생들이 가득했다. 실전처럼 시간을 정해놓고 문제를 함께 푸는 ‘스터디 모임’도 눈에 띄었다.

정부가 ‘공공 일자리 81만 개 확충’을 공언하면서 청년들 사이에서 기대감이 높아지고 있다. 8월 청년실업률이 18년 만에 가장 높은 9.4%를 기록하는 등 갈수록 취업여건이 나빠지자 ‘기댈 곳은 공무원시험’뿐이라는 인식이 퍼지고 있다.

경일대 사회복지학과 4학년 박경옥 씨(22·여)는 올해 상반기까지 일반 사기업 취업을 준비했지만 현재는 공무원 시험을 적극 고려하고 있다. 박 씨는 “공무원 시험을 준비한다는 친구들이 절반은 되는 것 같다”며 “주변에서 ‘올해가 기회’라며 공무원 시험 준비에 나선 친구가 많다”고 말했다.

학원가에서도 이런 움직임에 발 빠르게 대처하고 있다. 교육업체들은 앞다퉈 공시생 대상의 추가 커리큘럼을 준비하고 시험 설명회를 여는 등 ‘특수’를 노리고 있다.

하지만 청년들의 기대감만큼 현장에서 취업난 개선을 체감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권순원 숙명여대 경영학부 교수는 “공공부문만 준비하는 것은 올바른 선택이 아니다”며 “청년들의 기대만큼 큰 일자리 공급은 없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권 교수는 “지금 이루어지는 공공부문 일자리는 신규로 만드는 것이 있지만 기존 비정규직을 전환하는 자리도 있다”며 “청년들이 공공부문 일자리만 염두에 두고 ‘고시 낭인’으로 전락하지 않도록 민관 일자리의 균형을 맞추는 정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최지선 aurinko@donga.com·김동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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