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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시인은 이를 두고 ”해외토픽 감으로 전파를 타고 번질 가능성도 없지 않다“고 지적한 뒤 ”불임시술 조건은 주공이 그 본래의 사명에서 이탈한 일종의 월권행위며 젊은 이 나라 부부에게 내 집 마련의 기회를 박탈하는 처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역설적으로 풀이한다면 반포 아파트에는 앞으로 가정의 별이며 꽃이라 할 수 있는 어린이의 웃음소리를 듣기 힘들게 될 것이며 마치 양로원이나 인간 무덤을 방불케 할 것이니 이 얼마나 삭막한 풍경이겠는가. 안타깝기만 하다“고 썼다.
물론 김 시인 걱정은 기우였다. 이제 재건축을 통해 자취를 감춘 반포 주공 2단지는 마치 양로원이나 인간 무덤을 방불케 하는 삭막한 풍경은 아니었다. 하지만 당시 어떻게든 아파트를 분양받겠다는 목표는 60대 남성들까지 기꺼이 수술대에 눕게 했다.
”불임시술을 하지 않아 이번 분양신청에서 4순위로 밀리고 나니 ’마이 호움(홈)‘의 꿈이 깨어지는 것 같아 속이 상한다. 10년 전에 남매를 낳은 후 나는 남편과 합심해 피임 등 여러 방법으로 가족계획을 하고 있다. 불임수술만 하지 않았다 뿐이지 솔선하여 가족계획을 하고 있는 선의의 무주택 서민을 감안하지 않은 이 원칙이 과연 공정한 것일까. 더구나 7자녀든 8자녀든 많은 아이를 갖고 있어도 불임시술만 하면 2순위로 올려주고 무자녀라도 하지 않으면 4순위로 떨어뜨리는 이 원칙 때문에 회갑을 넘긴 할아버지들이 수술을 받는 기현상까지 빚고 있다니 어처구니가 없다. 이러고도 불임시술이 인구 억제책의 보도(寶刀)가 될 수 있으며 주택분양의 대원칙이 될 수 있을까.“
물론 중장년층 남성들이 꼭 자기가 살 집을 구하려고 불임수술을 받는 건 아니었다. ’분양권 전매‘는 그때도 유효한 돈벌이 수단이었던 것.
그해 9월 17일 동아일보 횡설수설은 ”세상이 각박하니 인심이 야박 서러운지, 인심이 야박하니 세상이 각박해지는지 알 수는 없으나 조금이라도 이득이 된다고 생각하면 남에게 뒤질세라 아귀다툼을 벌이는 풍토가 적지 않다“고 당시 상황을 소개했다. 이어 ”아파트 입주 신청에 있어 불임 수술자에게 우선권을 주자 요즘 각 보건소에는 가족계획과는 별 상관이 없는 50, 60대의 노인들까지 몰려오는 기현상이 벌어지고 있다고 한다. (중략) 불임 수술자 중에는 자기가 입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례를 받고 대리 신청을 하기 위한 사람도 있는 모양이니 세상인심을 알 만하다“고 전했다.
이제 우리가 사는 21세기는 거꾸로 자녀가 많아야 아파트를 분양받기 유리한 세상. 그래도 결혼 전 정관수술을 받는 미혼 남성이 한둘이 아니다. 맞다. 옛날이라고 그저 아이를 많이 낳고 싶었던 건 아닌 것처럼, 지금 우리도 무조건 아이를 적게 낳고 싶은 게 아니다. 그렇다고 아이를 키우고 싶은 것도 아니다.
황규인 기자 kin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