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연희전문학교
연희전문 재학 시절 윤동주가 기숙사 생활을 했던 연세대 핀슨홀 전경. 양회성 기자 yohan@donga.com
1938년 2월 광명중학교를 졸업한 윤동주는 4월 9일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진학한다. 입학하자마자 핀슨홀 3층 ‘천장 낮은 다락방’에서 고종사촌 송몽규, 브나로드 운동을 열심히 했던 강처중과 한방을 쓴다. 사실 그리 기분 좋은 시기만은 아니었다. 1938년 3월 총독부는 ‘일본인과 조선인 공학(共學)의 일원적 통제를 실현’한다면서 조선어를 수의(隨意)과목, 곧 선택과목으로 만들었다. 조선어를 폐지하는 단계에 들어선 것이다. 국어(일본어)를 쓰는 학생과 안 쓰는 학생을 구별하여 상벌을 주라는 훈시가 내렸다.
연세대 핀슨홀 건물 앞에 세워진 시비. 양회성 기자 yohan@donga.com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어제도 가고 오늘도 갈
나의 길 새로운 길
민들레가 피고 까치가 날고
아가씨가 지나고 바람이 일고
나의 길은 언제나 새로운 길
오늘도…… 내일도……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 윤동주, ‘새로운 길’
핀슨홀 내부에는 윤동주 기념관이 마련되어 있다. 양회성 기자 yohan@donga.com
포기하지 않고 견딜 수 있는 까닭은 가운데 3연에 나오듯, 민들레가 피고, 까치가 날고, 아가씨가 지나고, 바람이 일기 때문이다. 보이는 ‘곁’이 있기 때문이다. ‘식구로는 굉장한 것이어서 한 지붕 밑에서 팔도 사투리를 죄다 들을 만큼 모아놓은 미끈한 장정들만이 욱실욱실하였다’(‘종시·終始’)는 기숙사 핀슨홀 생활이 즐겁기도 했기 때문일 것이다. 최현배, 손진태, 이양하 등 당시 최고의 스승들에게 역사며 우리말을 배울 수 있는 긍지는 얼마나 뿌듯했을까.
원하던 학교에 입학한 달뜬 기대를 표현한 시로 이 시를 읽을 수 있다. 한글로 썼다는 사실도 대단치 않을 수도 있다. 이전에도 한글로만 쓴 시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선어 사용과 교육이 금지되기 시작한 배경을 생각하면, 조금 고집스러운 오기를 느낄 수 있다. 희망 없는 반복이 지겹더라도, 이 길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 걷겠다는 풍성한 반복 의지가 엿보인다.
그의 길은 어떤 길이었을까. 윤동주를 저항시인이니 민족시인이니 특정 브랜드로 정하는 것은 부분으로 전체를 규정하는 침소봉대를 범할 수 있다. 그의 시에 저항과 민족이라는 요소가 있지만, 그 범주로 윤동주를 한정할 수는 없다. 그의 저항과 실천은 미묘하게 숨어있다. 수수하게만 보이는 ‘새로운 길’에도 저항의 단초가 숨어 있다.
역사를 지키는 투쟁은 기관총에 의해서만이 아니다. 망각에 저항하는 기억이야말로 지루한 투쟁이다. 지옥 같은 세상에서도 살 만한 세상을 꿈꾸는 판타지를 유지하는 것은 지루하기 짝이 없는 잔혹한 낙관주의(cruel optimism)다. 대학교 초년생의 한낱 달뜬 마음을 담은 소박한 소품일지 모르나, 여기에는 죽지 않는 저항의 씨앗이 담겨있지 않은가.
‘새로운 길’을 시발로 금지된 언어로 계속 시를 쓰며 그는 금지된 시대에 균열을 일으켰다. 그에게 ‘새로운 길’을 가자는 의지는 ‘아Q정전’(루쉰)의 정신승리법이 아닌 구체적인 실천으로 이어졌다. 금지된 언어로 19편의 시를 깁고 다듬어 시집을 내려 했다. 이것이야말로 ‘죽어가는’ 한글을 사랑하는 실천이었고, 망각을 강요하는 권력에 대항하는 저항이었다. ‘새로운 길’을 꿈꾸며 견디려 했던 그는 4학년에 오르면 급기야 ‘모가지를 드리우고 피를 흘리겠다’는 위험한 다짐까지 써 놓는다.
김응교 시인·숙명여대 교수
무한한 성찰과 저항을 거쳐 조선어는 존재해 왔다. 보이지 않고 하찮아 보이는 저항들이 모여, 거대한 언어의 역사와 단독자의 자유를 지켰던 것이다.
김응교 시인·숙명여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