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태봉산(서초구 우면동)의 월산대군(성종의 형) 태실. 서울에서 석함과 태비를 원형 그대로 볼 수 있는 유일한 태실로 명당에 자리 잡고 있다.
안영배 전문기자·풍수학 박사
이들은 신생아의 탯줄부터 허투루 다루지 않는다. 아이를 쏙 빼닮게 만든 수공예 인형 속에다 탯줄을 보관하는 ‘탯줄보관인형’이 인기를 끌고 있다고 한다. 실내 인테리어를 염두에 둔 다양한 탯줄 보관용 도장, 액자 등도 속속 선보이고 있다. 귀하게 얻은 아이인 만큼 탯줄을 남다르게 기념하고 싶은 마음일 게다.
탯줄을 소중히 여기는 그런 트렌드가 풍수인 입장에서는 반갑기도 하다. 병원에서 받아온 탯줄을 냉장고 속에 넣어두고 까맣게 잊고 지내거나, 버리기에는 찜찜해 처치 곤란한 대상쯤으로 여기는 것보다는 훨씬 바람직스럽기 때문이다.
“현명하고 우둔함(賢愚), 잘될지와 못 될지(盛衰)가 모두 태에 달려 있으므로 신중히 다루지 않을 수 없다.”
풍수서 ‘태장경(胎藏經)’의 가르침이다. 탯줄을 어떻게 보관하느냐에 따라 신생아의 미래가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태장경은 고려 때 국가공인 지관(地官)을 선발하기 위한 과거 과목 중 하나일 정도로 중시됐다. 고려뿐만 아니다. 조선 왕조에서도 왕자와 공주 등 왕족의 탯줄을 보관할 때 태장경을 중요한 근거 자료로 활용했다.
태장경은 구체적으로 탯줄을 명당 길지에 묻어서 보관하면 태주(胎主·탯줄 당사자)의 무병장수를 보장한다고 가르친다. 게다가 남아일 경우 총명해서 학문을 잘 닦고 높은 관직에 오를 수 있으며, 여아의 경우는 얼굴이 예쁘고 단정하며 뭇사람의 존경을 받게 된다고 한다. 신체의 일부인 탯줄을 길한 곳에 묻으면, 그에 감응한 태주 역시 좋은 기운을 누릴 수 있다는 논리다. 이를 풍수에서는 동기감응(同氣感應)이라고 한다.
탯줄을 적극적으로 관리한 조선 왕실은 왕자와 공주의 태실(胎室·탯줄을 묻어놓은 곳)을 ‘태봉(胎峯)’이라고 이름 붙이고, 일반인들의 접근을 금지했다. 심지어는 태실을 이장까지 했다. 임금이 즉위하면 세자나 왕자 시절 묻었던 태를 꺼내 더 좋은 명당을 골라 이장하는 것을 아예 예법으로 정해 놓기까지 했다. 14대 임금 선조는 세 차례에 걸쳐 좋은 터를 물색한 끝에 충청도의 임천에 자신의 태를 묻기도 했다.
그런데 탯줄을 묻는 행위가 중국과 일본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선조수정실록’에는 “태경(胎經·태장경)의 설이 시작된 것은 신라·고려 사이인데, 중국에서 있었던 일은 아니다”라고 기록돼 있다. 우리 고유의 풍습이자 풍수설이란 말이다. 실제로 신라의 명장 김유신이 태어난 충북 진천의 태령산(胎靈山) 정상에는 김유신태실(사적 제414호)도 있다. ‘삼국사기’는 “김유신의 탯줄을 높은 산에 묻었는데, 지금(고려)도 그 산을 태령산이라 한다”고 기록했다.
우리 전통의 ‘탯줄 풍수’를 현대사회에서 그대로 따라 행하기란 현실적으로 힘든 일이다. 산부인과 병원에서 산모의 태반을 통째로 내주지도 않거니와, 태실을 설치할 만한 장소를 구하는 것도 쉽지 않다.
그 대신 신생아의 배꼽에 달려 있던 손가락 크기만 한 탯줄이나마 아이의 미래를 위해 활용해 볼 여지는 있다. 아이의 정서적 뒷배가 될 수 있는 장소를 골라 탯줄을 묻어두는 방법이다. 지방의 선산도 좋고, 아이가 자라서 추억할 만한 명소도 좋다. 물론 태를 묻는 곳이 명혈(明穴)과 길지(吉地)이면 금상첨화일 것이나, 최소한 수맥파나 살기만 피한 곳이라도 괜찮다. 태실이나 봉분을 조성하는 것이 아니라 손바닥만 한 항아리나 도자기 속에 탯줄을 넣어 땅속에 묻어두므로 자연을 훼손할 일도 없다.
그렇게 태를 묻어둔 곳이 바로 아이의 고향이 된다. 병원에서 태어난 아이지만 자랐을 때 “너의 태는 어느 산에 묻혀 있다. 너는 그 산의 정기를 이어받고 있다”고 말해 줄 수 있을 것이다. 아이는 자신의 삶에서 자부심과 함께 자연과의 유대의식을 가질 수 있지 않을까.
안영배 전문기자·풍수학 박사 oj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