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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말대로 누구를 ‘위안’하는 것은 능동적인 행위여야 한다. 사전은 ‘위안’을 ‘위로하여 마음을 편하게 함’이라고 정의하고, 다시 그 속에 있는 ‘위로’를 ‘남의 괴로움이나 슬픔을 달래 주려고 따뜻한 말이나 행동을 베푸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즉 ‘위로’의 결과물이 ‘위안’인 셈이다. 그래서 위안은 자발적인 것이어야 한다. 그것이 강요하는 것이 되면 질서가 파괴된다. 언어의 질서, 윤리의 질서.
일제 파시스트들은 그 질서를 파괴한 자들이었다. 그들은 ‘위안’이라는 아름답고 고귀한 말을 왜곡해, 강제로 끌려온 여성들에게 ‘위안부’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러한 이름을 만든 게 먼저고 폭력은 그 다음이다. 그렇다. 그들은 ‘위안부’라는 말부터 만들어 개념을 정립하고 그들의 전쟁기계를 위해 식민지 여성을 동원했다. 신체적 폭력이 있기 전에 언어의 폭력, 인식의 폭력이 먼저 있었던 것이다.
가둘 수 있는 길이 아직은 있다. 폐기하면 된다. 나치에게 당한 유대인들이 그랬듯이, 우리도 홀로코스트에 해당하는 말을 만들면 된다. 특별한 말일 필요도 없다. 그 말만 아니면 되니까. 치욕의 말은 그것을 만든 국가에 돌려주고 우리의 말, 우리의 스토리를 만들면 된다. 그러한 트라우마적 사건에도 치유라는 것이 가능하다면 그 말, 그 스토리가 시작이다. 이것은 슈뢰더 전 총리가 우리에게 일깨운 상식의 소리이면서 공자의 말이기도 하다. 정명(正名). 이름을 바로 세우라.
왕은철 문학평론가·전북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