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 ‘매월당시사유록’에 수록된 김시습의 초상 판화 모각본. 동아일보DB
개성에 사는 사내 이생이 최랑이라는 처녀와 사랑에 빠진다. 신분의 차이로 부모의 반대를 겪기도 하지만 설득 끝에 혼인에 이른다. 이생이 과거에 급제하면서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되는 듯 했지만 홍건적의 난이 일어나 최랑은 목숨을 잃는다. 이생은 죽은 최랑의 혼령을 밤마다 만나며 위안을 얻는다. ‘금오신화(金鰲神話)’에 실린 작품 중 한 편인 ‘이생규장전’ 내용이다. ‘금오신화’에 수록된 ‘만복사저포기’ ‘취유부벽정기’ 등은 이승의 인간이 귀신, 용왕 등 환상의 캐릭터들과 만나며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현실과 판타지가 어우러진 소설인 셈이다.
‘금오신화’는 조선 시대 매월당 김시습(1434~93)이 한문으로 쓴 작품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소설로 알려졌다. 문헌들에 남겨진 기록에 따르면 명성은 높았으나 실체가 드러난 건 1927년에 이르러서였다. 육당 최남선이 일본에서 전해오던 목판본(1884년본) ‘금오신화’를 국내에 소개하면서다.
‘금오신화’ 최고 판본 발견 소식을 보도한 동아일보 1999년 9월 22일자 22면.
그러나 1999년 9월 21일 고려대 최용철 교수가 중국의 한 도서관에서 찾아내 공개한 ‘금오신화’ 목판본은 이보다 300년 가까이 앞선 것이었다. ‘최고(最古) 소설의 최고(最古) 판본’이었다.
앞서 학계에선 국내에서 ‘금오신화’ 필사본이 유통되다 임진왜란 때 일본에 알려졌고, 그곳에서 목판으로 찍어 간행됐다고 봤다. 주로 일본 학자들이 주장했던 내용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날 발견된 16세기 목판본은 최고 판본이라는 의미 뿐 아니라 조선에서 간행돼 책으로 만들어졌다는 증거가 됐다.
‘금오신화’는 귀신들이 등장해 ‘신(神)들의 이야기’로 보기 쉽지만 이 작품의 ‘신(新)’은 새롭다는 뜻이다. 예나 지금이나 작가의 글쓰기가 당대의 작품들과 차별되는 새로움을 추구했음을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김지영 기자 kimj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