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트렌드 생활정보 International edition 매체

[동아일보·채널A 공동취재]치매노인이 서빙… 실수 연발에도 웃음으로 감싼 손님들

입력 | 2017-09-21 03:00:00

[21일 ‘세계 치매의 날’]韓-日-그리스 언론 공동기획
日, 치매환자와 함께하는 ‘주문과 맞지않는 요리점’ 한시운영
“사회적 편견 해소 위해 기획”… 500명 펀딩-300명 식사 성황




《현대의학이 아직도 정복하지 못한 질환 ‘치매’. 세계보건기구(WHO)는 2030년 치매 환자수가 7600만 명에 육박할 것이라고 전망한다. 고령화 속도가 빠른 한국에서도 치매 환자의 급증이 심각한 사회 문제가 되고 있다. 동아일보는 21일 ‘세계 치매의 날’을 맞아 일본 아사히신문, 그리스 일간 카티메리니 등 해외 언론과 머리를 맞대고 치매 문제를 슬기롭게 극복하기 위한 다양한 해결책을 모색했다. ‘치매와의 전쟁’을 벌이고 있는 참신한 해외 사례들을 소개한다.》



[1] 17일 일본 도쿄의 한 식당에서 치매 환자(서 있는 사람)가 음식을 서빙하고 있다. ‘주문과 맞지 않는 요리점’이라는 이름의 이 식당은 치매 환자에 대한 편견 불식을 위해 사흘간 한시적으로 문을 열었다. 주최 측은 치매 환자의 서빙에 방해가 될 수 있다며 취재진의 사진 촬영은 허가하지 않았다. 주문과 맞지 않는 요리점 실행위원회 제공[2] 일본의 한 은행에서 손목에 주황색 팔찌를 찬 직원이 고객의 문의에 답하고 있다. 이 팔찌는 치매 관련 교육을 받은 ‘치매 서포터스(지지자)’임을 상징한다. 아사히신문 제공[3] 전자팔찌(손목 부분)는 치매 환자의 혈압, 수면 패턴 등을 체크해 블루투스로 연결된 태블릿PC에 관련 정보를 보내준다. ‘가디언 에인절’ 앱을 실행하면 환자의 상태가 주치의에게 전달된다. 그리스 카티메리니 제공

“디저트 드시겠어요?”

백발의 여성 종업원이 주위를 둘러보다가 조심스럽게 테이블로 다가갔다.

자리에 앉은 남성이 활짝 웃으며 답했다.

“이미 먹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잠시 후 다른 종업원이 다시 디저트를 권했다. 남성은 짜증을 내는 대신에 여전히 밝은 얼굴로 ‘괜찮다’고 했다.

17일 오후 찾아간 일본 도쿄(東京) 고급 주택가 롯폰기(六本木)의 식당에선 일반 레스토랑이라면 언뜻 이해하기 힘든 풍경이 자주 연출됐다. 종업원이 테이블을 헷갈리는 것은 다반사였다. 포크를 바닥에 떨어뜨리고, 마시지 않은 음료수를 금방 가져가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식당 안에선 불평 대신 웃음꽃이 피었다.


식당 앞에는 혀를 내민 일러스트와 함께 ‘주문과 맞지 않는 요리점’이란 간판이 붙어 있었다. 일본 ‘경로의 날’(19일)과 세계보건기구(WHO)가 정한 ‘세계 치매의 날’(21일)을 맞아 사흘 동안 한시적으로 문을 연 식당이다. 이날 서빙을 맡은 종업원 20여 명은 모두 치매 환자들이다.

이날 종업원으로 일한 야마구치(山口)현 출신의 80대 여성은 “음식을 잘못 가져다주는 등 여러 번 실수했는데 손님들이 다들 ‘사과할 필요 없다’고 해서 기뻤다. 집에 혼자 있으면 외로운데 대화를 나눌 수 있어 즐거웠다”고 했다. 이어 “기회가 되면 또 일하고 싶다”고 덧붙였다.

이 식당을 창안한 사람은 방송국 PD로 일하는 오구니 시로(小國士郞·38) 씨. 그는 5년 전 치매 노인이 사는 그룹 홈을 취재하다가 식사에 동석했다. 메뉴는 햄버거였는데 정작 나온 건 만두였다. 오구니 씨는 본보와의 인터뷰에서 “먹으면서 맛있으면 되는 것 아닌가 생각했다. 주변에 이런 관용이 퍼진다면 치매에 걸린 이들도 보통의 생활을 이어갈 사회 분위기가 조성되지 않을까 싶었다”고 말했다.

오구니 씨는 치매 노인도 일할 장소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던 복지 전문가 와다 유키오(和田行男·61) 씨와 의기투합했다. 대형 포털사이트의 정보기술(IT) 전문가, 대형 광고 대리점의 디자이너, 유명 식당 요리사 등이 힘을 보태 실행위원회를 구성했고, 6월 초 지인들을 대상으로 이틀 동안 시범행사를 열었다. 테이블 10곳 중 6곳에서 크고 작은 실수가 발생했지만 10명 중 9명은 “식당을 다시 찾고 싶다”고 답했다.

용기를 얻은 실행위원회는 크라우드펀딩을 통해 본격적으로 행사를 준비했다. 필요한 자금은 800만 엔(약 8160만 원). 반응은 생각보다 뜨거웠다. 500여 명이 동참해 목표를 초과한 1291만 엔(약 1억3200만 원)이 모였다. 식당을 빌리고 전용 배지와 그릇, 컵, 앞치마 등을 제작했다. 디저트에도 로고를 새기는 등 세심하게 준비했다.

결과는 어땠을까. 사흘 동안 식당을 찾은 손님은 약 300명. 해프닝도 많았다. 대화를 나누다가 흥이 오른 종업원이 테이블에 앉아 손님과 함께 식사를 하는 사고(?)도 있었다. 그래도 누구 하나 짜증 내지 않았다.

일본의 치매 환자는 2015년 기준으로 약 500만 명이다. 고령화와 함께 치매 환자가 빠르게 늘고 있어 2025년에는 700만 명에 이를 것으로 예상된다. 이번 프로젝트 실행위원장을 맡은 와다 씨는 “치매에 걸린 이들이 오늘 일을 잊더라도 뭔가 즐거웠다는 느낌은 남을 것”이라며 “치매에 걸리더라도 능력을 발휘할 장소를 늘려 나가고 싶다”고 말했다.

도쿄=장원재 특파원 peacechaos@donga.com 

관련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