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영 채널A 심의실장
그런데 독일 여성들의 반응은 떨떠름하다. 여성 총리 덕을 보기는커녕 그의 집권기에 여권 수준은 오히려 뒷걸음질쳤다. 세계경제포럼의 성 격차 지수 나라별 순위에서 독일은 그가 집권한 이듬해인 2006년 5위였으나 2016년엔 13위로 떨어졌다. 뉴욕타임스는 “독일에선 남자 총리를 상상하기 어렵듯 여자 최고경영자(CEO)를 상상하는 일도 불가능하다”고 전했다.
여성들은 메르켈 총리가 페미니스트라고 공언하지 않는 것도 불만이다. 그는 올 4월 주요 20개국(G20) 여성경제정상회의에서 ‘당신은 페미니스트인가’라는 질문을 받고 페미니즘의 취지에 공감을 표시하면서도 “개인적으론 그 배지(페미니스트)를 달고 싶지 않다”고 답했다. 요즘 세상에 “난 페미니스트가 아니다”라고 할 정신 나간 정치인이 있을까. 놀란 사회자는 참석자들에게 “페미니스트인 사람들은 손들어 보라”고 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딸 이방카도, 크리스틴 라가르드 국제통화기금 총재도 손을 들었지만 메르켈 총리는 끝까지 가만히 있었다.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중성화는 1인자의 카리스마에 의존하는 대통령제와 달리 다양한 정치 세력과 연정해야 하는 의원내각제에 잘 먹히는 전략 같다. 중도우파인 메르켈 총리는 낮은 자세로 진보적인 사회민주당 및 녹색당과 정책을 조율해 가며 최악의 금융위기를 포함한 국내외 난제들을 해결해 왔다. 그의 조용한 리더십에 대해 BBC뉴스는 “문제를 수동적으로 해결만 할 뿐 새로운 비전이나 정책을 제시하는 모험을 하지 않는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수비형이 공격형보다 시원한 맛은 없어도 실점이 없는 법. 메르켈 총리는 집권 12년간 지지율이 46% 아래로 내려간 적이 없다(독일 공영방송 ARD 조사).
페미니스트가 아니라는 메르켈 총리의 성공은 페미니스트임을 자처하며 미국 대선에 도전했던 힐러리 클린턴의 실패와 비교된다. 메르켈은 정체성 정치의 덫에 빠지지 않고 실용주의 전략으로 장기집권하고 있다. 여당에서 메르켈 외에 대안이 없는 것이 우연일까. 후계자를 키우지 않는 마키아벨리스트의 면모를 그는 포커페이스에 용케도 숨겨 왔다. 클린턴은 졌지만 ‘유리천장’ 연설로 기억된다. 메르켈 총리는 여성 문제에 소홀했던 정치인으로 기억될 것이다. 동시에 가장 오래 살아남았던 여성 정치인으로 기록될 것이다.
이진영 채널A 심의실장 ecol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