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신과 예방접종
자궁경부암 백신을 맞고 있는 12세 여자아이. 우리나라에서는 2, 4가 백신을 쓰지만 일부 선진국에서는 최신 백신인 9가 백신을 접종한다. 동아일보DB
이진한 의학전문기자
3가 백신은 무료지만 4가 백신은 1인당 4만 원이다. 하지만 돈이 문제가 아니다. 매년 세계보건기구(WHO)는 그해 유행하는 4가지 독감 바이러스 중 3가지를 예측해 3가 백신을 만든다. 문제는 백신에 포함되지 않은 나머지 1개 바이러스가 유행하면 독감 환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는 점이다. 이를 ‘미스매치’라고 한다.
미국은 2001∼2011년 10번의 독감 시즌 동안 5번, 유럽은 2003∼2011년 8시즌 중 4번이나 미스매치가 발생했다. 우리나라도 2007∼2011년 5시즌 중 2번의 미스매치가 있었다. 이 때문에 대한감염학회는 ‘성인예방접종 가이드라인’에 4가 백신 사용을 권고했다. 미국과 영국이 2013년부터, 호주가 2016년부터 4가 백신을 국가예방접종에 포함시킨 이유다.
국가예방접종에 포함된 다른 백신의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다. 6월부터 디프테리아와 파상풍, 백일해, 소아마비(DTap), 헤모필루스 인플루엔자 비형균(Hib) 감염증을 예방하는 5가 혼합백신이 국가필수예방접종에 포함돼 영유아에게 무료로 제공된다. 그러나 세계적으로 이미 5가 혼합백신에 B형 간염을 포함한 6가 백신이 대세다. 유럽 33개국 중 이탈리아와 오스트리아, 네덜란드 등 15개국이 국가예방접종에 6가 백신을 포함하고 있다.
딸의 건강을 위해 접종시키는 자궁경부암 백신은 어떤가? 여기엔 2가, 4가, 9가 백신이 있다. 우리나라는 지난해부터 만 12세 여아를 대상으로 자궁경부암 예방을 위해 2, 4가 백신을 무료 접종하고 있다. 하지만 이번에도 서민 부모들은 괴롭다. 2, 4가 백신은 이미 선진국에서 퇴출된 백신이다. 미국과 뉴질랜드, 오스트리아 등 일부 국가에선 지난해 새롭게 출시된 9가 백신을 국가예방접종 백신으로 교체해 사용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9가 백신을 맞으려면 비용이 40만 원(2회 접종) 가까이 든다.
정부는 9가 백신의 효능에 대한 장기 데이터가 없다는 핑계를 대고 있다. 하지만 미국은 5월부터 기존 자궁경부암 백신의 사용을 모두 중단하고 9가 백신 한 가지만 접종하고 있다. 자궁경부암을 90%(기존 백신은 70% 정도)까지 예방할 수 있어서다. 필자 역시 만 12세인 둘째 딸에게 국가가 무료로 제공하지만 예방률이 낮은 백신을 맞혀야 할지, 아니면 고가의 새 백신을 맞혀야 할지 고민이다. 차라리 정부가 9가 백신도 무료 접종 대상에 포함시키되 추가 비용만 부모가 부담하도록 했다면 나았을 것이다.
무조건 최신 백신이 좋다는 얘기가 아니다. 우리나라도 선진국과 똑같은 무료 접종 서비스를 제공해야 한다는 얘기도 아니다. 하지만 국가예방접종 사업의 목적을 되돌아봐야 한다. 국민을 전염병으로부터 안전하게 보호하는 것이 최고 가치다. 그렇다면 비용의 문제로만 접근해선 안 된다.
세계는 지금도 감염병과 사투를 벌이고 있다. 예방접종으로 많은 질병이 종적을 감췄지만 바이러스들은 완전히 박멸된 것이 아니다. 언제든 고개를 들고 국민의 건강을 위협할 수 있다. 모든 질병은 치료 이전에 예방이 최선이다. 최선의 예방 대책이 이미 마련돼 있는데도 비용 문제로 더 좋은 백신을 공급하지 못한다면 바로 그 나라가 의료 후진국이다.
이진한 의학전문기자 likeda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