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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타자 이승엽의 23년’을 말한다…⑦강물처럼, 연어처럼

입력 | 2017-09-22 05:30:00

삼성 이승엽은 ‘국민타자’로 불리는 슈퍼스타지만 처음 만나는 사람들이 대부분 깜짝 놀랄 정도로 겸손하다. 운동선수로 철저한 자기관리는 물론이고 훌륭한 인품은 지금의 이승엽을 만든 큰 힘이었다. 사진제공|스포츠코리아


‘국민타자’ 이승엽(41)이 마침내 은퇴한다. 1995년 삼성 유니폼을 입고 프로에 데뷔한 뒤로 23년이다. 일일이 열거하기도 힘들 정도로 숱한 불멸의 대기록과 영광의 기억이 함께했다. 한 시절을 주름잡던 대스타들을 보며 그가 성공을 꿈 꾼 것처럼, 지금은 ‘미래의 이승엽’을 머릿속에 그리는 선수들이 넘쳐난다. 40년을 바라보는 KBO리그, 100년을 훌쩍 넘긴 한국야구에서 그 누구보다 위대한 타자였기 때문이다. 스포츠동아는 21세기 한국야구의 최고 스타로 기억될 이승엽의 발걸음을 매주 주말판을 통해 되돌아보는 기획 시리즈를 마련했다.

⑦ 흐르는 강물처럼, 거꾸로 오르는 연어처럼…23년의 꾸준함을 채운 비결

이승엽은 8년간의 일본 시절(159개)을 포함해 프로통산 624개의 홈런을 터트렸다. 해마다 27개꼴로 꾸준히, 또 묵묵히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홈런들을 토해냈다. 그 비결은 무엇일까. 사람마다 관점과 시점이 다른 까닭에 다양한 분석이 가능할 터. 그러나 몇 가지 공통분모도 드러난다. 타고난 재능을 산산조각내거나, 야구인생을 굴곡지게 만드는 결정적 부상을 이겨냈다는 사실이다. 후천적 노력 또한 빼놓을 수 없다. 때로는 ‘흐르는 강물처럼’, 때로는 ‘거꾸로 강을 거슬러 오르는 저 힘찬 연어들처럼’ 한결같았던 23년의 원동력을 살펴본다.

삼성 이승엽. 사진제공|스포츠코리아


● 은퇴 후에도 지속될 ‘자기관리’

이승엽은 자기관리의 모범이다. 스스로도 인정한다. 그는 “원체 좋은 몸을 타고 난 덕분이다. 어렸을 때는 진짜 잘 먹었다”면서도 “프로라면 자기 몸 관리는 당연하다. 프로가 된 뒤 꾸준히 웨이트 트레이닝을 하고 식단관리를 했다. 지금도 체중은 94~96㎏ 정도를 유지하고 있다. 그러기 위해 꾸준히 운동하고 있다”고 밝혔다.

한 살 두 살 나이가 들어가도 변함이 없다. 그는 “나이가 들면 아무래도 많은 음식을 소화할 순 없고, 지금은 1루 수비도 많이 나가진 않으니까 아무래도 몸 움직임이 많지 않다. 그래서 이제는 소식을 한다”고 설명했다. 이어 “은퇴한 뒤에는 지금보다 체중을 좀더 뺄 생각이다. 그러려면 계속 운동하면서 관리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물론 끝내 이겨내기는 했지만, 한때는 그도 부상으로 적잖은 시련을 겪었다. 이승엽은 자기관리의 실패에서 그 원인을 찾았다. “왼쪽 팔꿈치, 무릎, 엄지 수술을 받았는데 모두 내 잘못이다. 왼손 엄지는 2005년 스프링캠프 때 괜히 수비훈련에 욕심을 냈다가 다쳤고, 결국 수술을 받았다. 무릎은 2006년 경기 때 1루에서 세이프였는데 심판이 아웃 판정을 내리는 바람에 덕아웃 벤치(실제는 보호판)를 발로 찼다가 다쳤다.”

그의 고백대로 2006년의 무릎 부상은 TV 화면으로도 전해졌다. 요미우리 시절로, 그 해 8월 9일 야쿠르트전이었다. 9회초 무사 2·3루서 좌익수 앞에 떨어지는 짧은 안타를 날렸는데, 2루심이 플라이 아웃으로 판정해 안타와 타점을 모두 잃었다. 평소 절제된 언행으로 일관하는 이승엽이지만, 그 때만큼은 몹시도 억울했던지 분을 삭이지 못했다.

이승엽은 당시의 뒷이야기도 털어놓았다. “심판도 오심을 인정했다. 다만 ‘판정을 바꿀 순 없으니 미안하다’고 하더라.” 흥분하는 감정과 태도야말로 경기장 안에서도, 밖에서도 운동선수가 가장 경계해야 할 요소 중 하나임에 분명하다. 수술까지 받아야 했으니, 화를 참지 못한 대가치고는 너무도 컸다.

왼쪽 엄지 부상의 여파도 심각했다. 타격 때 엄지로 전해지는 울림 때문에 엄청 고생했다. 손에 힘을 모으기도 힘들 정도였다. 결국 수술을 받았지만(2007년 10월), 후유증이 지속됐다. 일본에서의 후반부 4년(2008~2011년)을 엉망으로 만든 주범인지 모른다.

삼성 이승엽. 사진제공|스포츠코리아


● ‘노력의 아이콘’이 되기까지

‘평범한 노력은 노력이 아니다!’ ‘진정한 노력은 결코 배신하지 않는다!’ 모두 이승엽의 성실함을 상징하는 말들이다. 곁에서 지켜본 누구나 그를 칭찬하는 이유다. 1995년 삼성에 갓 입단한 신인 이승엽을 지도했던 박승호(59) 전 NC 코치는 “워낙 성실한 선수였다. 지금까지 내가 만난 다른 선수들의 신인 시절과 비교해도 승엽이는 확실히 달랐다. 정말 열심히 운동했다. 또 무슨 얘기든 주문하면 잘 흡수하곤 했다”고 떠올렸다.

물론 이 만한 타자가 노력만으로는 탄생하지 않는다. 재능도 범상치 않았다. 특히 뭇 신인들이 그렇듯 프로 초기에 재능을 제대로 어필하지 못하면 자리를 잡기까지 그만큼 더 시간이 걸린다. 초고교급 왼손투수로 주목 받았던 이승엽을 타자로 변신시킨 데 대해 박승호 코치는 “몸이 부드러워 타자로서 매력이 있었다. 현역 시절 나도 좌타자였기 때문에, 그 경험을 살려 타자를 만들어보기로 마음먹었다”고 돌아봤다.

선수의 재능과 성실성, 지도자의 안목과 노하우가 접목되면 드디어 온전한 작품이 빚어진다. 박승호 코치는 “승엽이가 고등학교를 막 졸업했을 당시에는 크로스 스탠스여서 몸쪽 공을 잘 치지 못했다. 그래서 스탠스와 어깨를 열어 몸쪽 공을 칠 수 있게 훈련시켰다”고 회상했다. 이어 “처음에 (타자 전향 여부를 놓고) 구단의 반대가 심했다. (우용득) 감독님과 함께 타자로 만들기로 결정했다. 허리를 잘 쓰면서 한국을 대표하는 홈런타자로 성장해 보람을 느낀다”며 흐뭇해했다.

홈런타자로의 본격적인 변신은 박흥식(55) KIA 코치가 이끌었다. 그도 이승엽의 ‘부드러운 몸’에 주목했다. 박흥식 코치는 “유연성이 뛰어났다. 하체에 중심을 두고, 파워만 키우면 얼마든지 장거리타자가 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당시에도 콘택트 능력은 뛰어났다. 또 하체가 단단해지면 밸런스와 중심이동이 더 좋아진다. 그 과정이 몹시도 힘들었을 텐데 본인이 잘 받아들이고 많이 노력했다”고 회고했다.

23일 서울 고척 스카이돔에서 열릴 ‘2017 프로야구 KBO리그’ 넥센 히어로즈와 삼성 라이온즈의 경기에 앞서 삼성 이승엽 ‘은퇴투어’에서 36번 유니폼을 입은 넥센 선수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다. 사진제공|스포츠코리아


●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반듯한’ 인품

이승엽의 타고난 성품도 주목할 만하다. 스포츠스타든, 연예스타든 작은 성공에 취해 멋대로 행동하다가 낭패를 보는 이들이 적지 않다. 이승엽은 프로 데뷔 시절이나 지금이나 ‘반듯한’ 면모를 잃지 않고 있다. 갓 스무 살이던 때부터 그를 20년 가까이 지켜본 이의 평가도 다르지 않다. 경기도 용인의 삼성트레이닝센터(STC)를 이끌고 있는 권오택(56) 센터장은 삼성 라이온즈에서 홍보·운영·마케팅 등 다양한 구단 업무를 두루 맡은 덕분에 이승엽의 여러 면을 볼 수 있었다.

권 센터장은 이승엽이 부친 이춘광(74) 씨의 인품을 그대로 물려받았다고 생각한다. 이를 뒷받침하는 오래 전의 한 가지 일화를 여전히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권 센터장에게 이승엽과 그의 부친은 ‘넉넉하고 선한’ 이미지로 각인돼있다.

“1995년이다. 수원과 잠실에서 원정 6연전이 벌어졌는데, 내가 눈병이 걸린 이승엽을 매일 경기장과 호텔까지 데려다줬다. 차 안에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면서 ‘참 성실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사실 신인선수와 그렇게 오랜 시간 대화할 일은 없다. 그런데 며칠 후 구단 사무실로 이승엽의 아버님이 전화를 주셨다. ‘아들을 잘 보호해줘서 고맙다’는 감사인사였다. 대부분의 부모들은 ‘구단 소속선수니까 당연한 것 아니냐’고 생각하는데 전화까지 해주셔서 깜짝 놀랐다. 이승엽이 지금까지 모범적인 선수생활을 할 수 있었던 데는 아버님의 훌륭한 인품과 가정교육도 큰 힘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정재우 전문기자 jac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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