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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투 더 동아/9월 25일]1920년 동아일보 1차 정간

입력 | 2017-09-24 13:18:00



1920년 9월 25일은 일제 강점기에 항일 투쟁의 선봉에 섰던 동아일보가 제 1차 정간을 당한 날이다. 동아일보는 일제 치하에서 총 4차례(1926년 3월 6일, 1930년 4월 16일, 1936년 8월 25일) 정간을 당했다.

1차 정간의 이유는 다음과 같다. 1920년 경북 영주에서 양반가 며느리인 박성녀 씨가 자살했다. 당시 박 씨 부부는 시어머니 상을 당했지만 기독교를 믿던 박 씨의 남편이 제사를 거부했다. 효심이 깊었던 박 씨는 남편의 이런 행동이 시어머니에 대한 큰 불효라고 여겨 자살로 효심을 증명하고자 했다.

박 씨의 죽음 후 한반도 전역에서 ‘제사 논쟁’이 불붙었다. 특히 당대 지식인이자 독립운동가인 월남 이상재 선생(1850~1927)과 한국 개신교의 대부이자 6.25 전쟁 중 납북된 양주삼 목사(1879~?)는 동아일보 지면을 통해 날카롭게 대립했다. 이상재 선생이 “한국인이 선조를 기리는 아름다운 전통”이라고 주장한 반면 양주삼 목사는 “우상숭배”라고 반박했다.


동아일보는 이 선생의 의견에 동조해 9월 25일 조상을 모시는 건 우상숭배가 아니라는 취지에서 ‘제사(祭祀) 문제를 재론(再論)하노라’라는 사설을 썼다. “사람 몸을 본떠 만든 우상이 아닐지라도 혹은 거울로 혹은 주옥으로 혹은 칼로, 그 밖의 어떤 모양으로든지 물형(物形)을 만들어 어떤 곳에 모셔두고 신(神)이 거기 있고 영혼이 거기 있다하여 숭배 기도함은 일체 우상숭배라 할 것이니….”

문제는 이 사설에 등장하는 칼(劍), 거울(鏡), 주옥(璽)이었다. 일제는 이 3가지가 일본 왕실의 신성(神聖)을 의미하는 삼종신기(三種神器)와 일치하며 동아일보가 일부러 왕실을 모독하고자 이를 사용했다는 이유로 같은 날 무기정간 처분을 내렸다. 조선총독부는 정간 이유서에서 “동아일보는 표면상 독립을 선동하는 일은 피하되 로마의 흥망을 논하며 은근히 조선 부흥을 이야기한다”고 주장했다.

동아일보는 이 사태 후 1921년 2월 21일에야 속간됐다. 이후에도 정간과 속간을 반복하다 일제의 야욕이 극에 달한 1940년 8월 10일 강제 폐간돼 광복까지 무려 5년간 침묵을 지켜야 했다.

백범 김구 선생(1876~1949)은 1945년 12월 1일 복간된 동아일보에 직접 ‘경세목탁(警世木鐸)’이라는 휘호를 선물했다. 일제의 압제를 딛고 일어서는데 기여한 동아일보가 광복 후에도 이를 계승, 발전시켜달라는 염원이 담긴 글귀였다.

하정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