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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에서/동정민]유네스코는 10월이 두렵다

입력 | 2017-09-25 03:00:00


동정민 파리 특파원

다음 달 24일 유네스코 국제자문위원 14명은 프랑스 파리에서 나흘 동안 기록유산 심사를 벌인다. 2년마다 세계적으로 보전할 가치가 있는 기록물들을 지정하는 의미 있는 작업이다. 그런데 심사를 앞둔 유네스코 관계자들의 얼굴은 어둡기만 하다.

올해 안건 130여 건이 논의될 예정인데, 안건마다 회원국들의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맞붙어 있다. 각국 대표부의 압박 총력전 탓에 유네스코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눈치만 보는 형국이다.

12일 일본 관방장관은 한중일을 포함해 8개국 15개 시민단체가 낸 일본군 위안부 기록물을 유산으로 지정할 경우 “행동을 취할 것”이라며 노골적으로 협박했다. 그 행동은 분담금 체납이나 미납을 뜻할 가능성이 높다.

유네스코는 195개 회원국이 내는 분담금으로 운영된다. 분담금은 회원국들의 의무사항이다. 그러나 그 분담금을 협박 ‘미끼’로 악용하는 일이 이어지고 있다.

분담금 규모 2위를 차지하고 있는 일본은 아직 올해분을 내지 않았다. 지난해에도 중국 난징 대학살 자료를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했다는 이유로 통상 4, 5월에 내던 분담금을 12월까지 안 내고 버티면서 유네스코의 속을 태웠었다. 올해도 위안부 기록물 유산 지정 결과를 보고 내겠다는 심산이다.

중국도 18일 외교부 대변인을 내세워 “위안부 기록물 등재에 일본은 간섭하지 말라”고 경고했지만 정작 자국 문제에 있어선 물밑에서 엄청난 압력을 넣고 있다는 후문이다. 1989년 톈안먼 사태 때 시위대를 진압하러 출동한 탱크를 가로막고 선 ‘탱크맨’의 사진이 기록유산으로 지정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중국은 분담금 규모 3위다.

유네스코가 눈치를 봐야 할 건 동북아뿐만이 아니다. 분담금 22%로 압도적인 1위인 미국은 2011년부터 한 푼도 내지 않고 있다. 국가로 인정할 수 없는 팔레스타인을 회원국으로 받아들였다는 이유에서다. 유네스코는 그러면서도 눈치 보느라 집행이사국에서 빼지도 못하고 있다. 올해 또 팔레스타인 해방 관련 포스터가 안건으로 오를 예정이다. 러시아마저 1941년 스탈린 정부가 발트 3국 국민을 강제로 시베리아에 이주시켰을 당시 유산이 의제로 올라오자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는 후문이다.

이달 21일 현재 195개 회원국 중 77개국이 분담금을 내지 않고 있다(세계 13위 규모로 분담금 약 2%를 담당하는 한국은 올 2월 완납했다). 분담금 총액 중 36%가 구멍이 난 상태다. 얼마 전 만난 유네스코 관계자는 “돈이 부족해 이미 각종 프로그램을 폐지하고 있고, 곧 직원들 월급까지 걱정해야 할 처지”라고 고충을 토로했다.

기록유산 신청은 개인이든 국가든 누구나 할 수 있다. 그동안 사무총장이 최종 결정권자이긴 하지만 국제자문위원회 결론에 사인만 하는 게 관례였다. 그러나 세계적으로 ‘국익 우선주의’가 팽배해지면서 안건별로 각국의 압박이 심해 이리나 보코바 사무총장이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11월 중순 임기를 마칠 것이라는 전망마저 나오고 있다.

후임 총장의 경우 분담금 3위인 중국이 1, 2위인 미국과 일본이 분담금을 제대로 내지 않는 것을 기회 삼아 분담금을 늘리면서 유력한 사무총장 후보로 치고 올라오고 있다. 일본은 이를 막기 위해 혈안이라는 말도 들린다.

이번 유엔총회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도, 테리사 메이 영국 총리도 유엔 분담금이 공평하지 않다며 삭감을 예고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 혹은 지역 평화를 위해 강대국들이 주도해 만든 유엔, 유네스코, 유럽연합, 북대서양조약기구 모두 강대국들의 ‘국익 우선주의’ 정책에 위기를 맞고 있다. 세계 평화가 위태롭다는 중요한 신호다.
 
동정민 파리 특파원 ditto@donga.com